|
국제통화기금(IMF)은 얼마 전 우리나라 금융시스템의 안정성을 평가한 보고서를 공개했다. 전체적으로는 금융위기급 충격이 벌어졌을 때 버틸 충분한 체력을 갖췄다며 높은 점수를 받았다. 그런데 유독 전세 시스템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감추지 않았다. 집주인이 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할 가능성이 있고, 주식 같은 고위험상품 투자와 연관성이 커지고 있다는 경고였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IMF의 원론적인 지적”이라고 확대해석을 경계했지만, 금융권에서는 이번을 계기로 전세제도의 위험을 제대로 짚어봐야 한다는 목소리도 크다.
사실 전세는 우리나라의 독특한 임대차 시스템이다. 주거공간을 빌리면서 적게는 수천만원부터 많게는 십억원 안팎의 돈을 집주인에게 사용료 대신 맡기고 집주인은 계약기간이 끝나면 전액을 그대로 되돌려준다. 집주인은 부족한 자본을 충당할 수 있고 세입자는 월세보다 저렴한 가격을 지불하면서도 안정적인 거주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집주인 입장에서는 전세보증금은 일종의 사적 부채다. 통상 2년 단위의 전세계약이 끝나면 세입자에게 돌려줘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세보증금에 대해서는 별다른 안전장치가 없는 게 현실이다.
문제는 전세보증금 차환 위험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 집주인은 전세보증금을 은행에 예치해 이자를 받거나 거주하는 주택의 구매 자금으로 활용했다. 그런데 저금리 기조가 장기화하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수익률을 높이려 예금자보호가 되는 안전한 상품보다 주식·펀드처럼 상대적으로 고위험 상품에 투자하는 경우가 늘고 있어서다. 자칫 손실을 보면 세입자에게 돌려줄 돈을 까먹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실제 작년 사회적으로 파장을 불러온 파생결합펀드(DLF) 사태 피해자 중에서는 퇴직금이나 전세보증금을 넣어둘 곳을 찾던 일반 투자자들 상당수가 투자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세시장 자체의 불확실성도 커졌다. 일부 지역에서는 전세값을 낮춰도 세입자를 구하지 못하는 역전세난이 심심치 않게 벌어진다. 기존 세입자에게 보증금을 되돌려받지 못해 발을 동동 굴러야 한다. 지난 4~5년 사이 주택가격이 가파르게 오르자 전세보증금을 끼고 ‘갭투자’가 늘었는데, 전세가 하락하면 이런 주택이 직격탄을 맞게 된다.
작년 한국은행이 발간한 전세시장 보고서에 따르면 전세가가 10% 추가 하락하면 세입자에게 보증금을 반환하기 어려운 가구가 3만2000가구에 이른다는 조사 결과도 나왔다. 금융자산을 처분하거나 금융기관에서 대출을 받더라도 전세 보증금 하락분을 감당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만약 같은 상황에서 새로운 세입자를 구하지 못하게 된다면 약 31만 가구는 전체 보증금 반환에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추산됐다. 주택도시보증공사(HUG)에 따르면 작년 전세보증금 반환 보증 사고가 1년 전보다 4배 이상 증가했다. 올해 1분기에 벌써 작년 전체의 3분의 1 수준에 육박하고 있다.
하지만 보증료 부담이 크다. 약 3억원의 전세보증금 반환보증에 가입하려면 연간 약 40만~50만원을 보증료로 따로 내야 한다. 2년짜리 전세계약을 맺는 동안 100만원 안팎의 보험료 부담을 져야 한다는 뜻이다. 아직 가입자가 많지 않은 이유다.
금융권 관계자는 “보증료 부담을 최대한 낮춰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할 위험을 줄여주려는 제도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