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멱칼럼] 1차대전 100주년과 영화 '영광의 길'

  • 등록 2014-09-03 오전 6:40:00

    수정 2014-09-03 오전 8:28:26

[류한수 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 올해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지 딱 100년이 되는 해다. 이 전쟁은 숱하게 많은 영화의 소재로 쓰였다. 최근만 해도 ‘파스샹달’ ‘워호스’ ‘포비든그라운드’ 같은 영화가 줄줄이 나왔다. 저마다 그 전쟁의 여러 면모를 묘사했다. 1차대전을 다룬 영화들 가운데 뇌리에 깊은 인상을 남기는 작품을 꼽으라면, ‘영광의 길(Paths of Glory)’을 고르고 싶다.

‘영광의 길’은 1957년 작이니 오래된 영화다. 하지만 전쟁이 얼마나 부조리한지를 곱씹게 해주는 작품으로 흑백화면에 87분간 펼쳐지는 ‘영광의 길’ 만한 게 없다. ‘영광의 길’은 지금까지도 가장 위대한 반전영화라는 평을 듣는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이 신예 시절 카리스마 넘치는 당대 스타 커크 더글러스와 의기투합해서 만든 작품이기도 하다. 원작은 험프리 콥이라는 미국작가가 프랑스 군인 네 명이 항명죄로 억울하게 처형된 실화를 소재로 1935년에 펴낸 소설이다.

줄거리는 이렇다. 1916년 프랑스 군 총참모부 브룰라르 장군이 사단장 미로 장군에게 독일군이 장악한 고지를 공격하라고 강권한다. 미로 장군은 무모한 공격이라며 난색을 보이지만 성공하면 진급할 수 있으리라는 브룰라르의 언질에 이내 마음을 바꾼다. 미로는 예하 연대장 닥스 대령(커크 더글라스 분)에게 돌격을 지휘하라고 말한다. 닥스는 상관의 명령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다. 하지만 병사들은 적진에 이르지도 못한 채 극심한 피해를 입는다. 미로는 용감하지 못한 군인에게 보여줄 본보기로 병사 100명을 처형하겠다며 길길이 날뛴다. 닥스는 애초 무모한 작전이 문제였다고 반발한다. 브룰라르는 3개 중대에서 1명씩 병사 3명을 뽑아 군사 법정에 세우자는 타협안을 제시한다. 재판정에서 닥스는 변호인으로서 부하를 구하려고 애쓰지만, 이미 결론을 내려놓은 판사는 병사 3명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이튿날 사단 전체가 지켜보는 가운데 총살형이 집행된다.

‘영광의 길’에 전투 신은 딱 한 번 나온다. 말 그대로 소나기처럼 퍼붓는 적군의 포화를 뚫고 돌격하는 병사들 사이에 있는 것처럼 느껴질 만큼 박진감이 넘친다. 하지만 전쟁의 비극은 병사들이 총탄에 픽픽 쓰러지고 사지가 포탄에 찢겨 날아가는 전투신에만 있지 않다. 참호에서 일상을 보내는 병사의 찌든 얼굴, 신체의 어느 부위에 부상을 입어야 고통 없이 죽을 수 있을지 논쟁을 벌이는 병사들, 제비뽑기로 또 소대장에게 밉보여서 또 인기가 없어서 법정에선 희생양, 그리고 총살대로 끌려가는 부하들을 지켜보는 닥스의 애처롭기 그지없는 시선. 이런 장면을 보노라면 어떤 대의명분을 내걸더라도 전쟁은 인간이 만들어내는 최고의 부조리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게 된다.

근·현대 이전 시기는 제쳐놓고 20세기만 살펴보더라도 적잖은 전쟁이 일어났다. 천문학적인 피해를 무릅쓰고 치러진 전쟁이 인류가 안고 있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한 적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1차대전만 하더라도 전쟁 지도자들의 주장처럼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 되기는커녕 불과 한 세대 뒤에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인류에게 5배나 더 큰 인명피해를 입히지 않았는가.

오늘날에도 시리아와 이라크에서 내전이 벌어지고 있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공격도 논란거리다. 동북아시아에서도 군사위기가 고조되고 있다. 멀리 가지 않더라도 지척에서 수십만대군이 대치하고 있지 않은가. 다시 보는 ‘영광의 길’은 걸작 예술의 감흥은 물론이고 역사의 교훈까지 다시금 되살려준다.

‘영광의 길’이라는 제목은 18세기의 영국 시인 토머스 그레이의 대표작 ‘한 시골 공동묘지에서 쓴 애가’라는 시에 나오는 ‘영광의 길을 따라가다 보면 무덤에 이를 뿐’이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종착지가 무덤이라는 사실을 알면 헛된 영광을 추구하며 전쟁의 길에 나서려는 인간이 조금은 줄어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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