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연 연극평론가] 연극의 시작은 이렇다. 무대 저 깊숙이 새로 분장한 배우들이 앉아 있고 경사진 무대를 기어오르는 또 다른 배우들이 있다. 드디어 무대를 거슬러 올라 새들에 도착한 이들이 알을 훔쳐간다. 낄낄거리며, 조롱하며, 생존의 절박함도 없이, 인간들은 바구니에 수북이 알을 담아 훔친다. 한바탕 인간들의 도둑질과 그런 인간들에게 분노하는 갈매기, 도둑질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아 알을 깨고 나온 아기 갈매기들이 세상을 향해 날아오르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이때 갈매기의 알을 훔치러 가는 인간들이 거슬러 올랐던 무대 앞 한켠에 여인이 등장한다. “아으! 그냥 이렇게 하라고? 계속! 또 바뀌었네. 내가 빠질 때마다, 대사가 하나씩 바뀌네.” 그러자 어미 갈매기 역을 하던 배우가 “연출이 또 바꿨습니다!”라고 받는 것이다. 무대는 어느새 공연을 연습하고 있는 리허설 혹은 무대 뒤의 공간이 된다.
| 연극 ‘갈매기’의 한 장면(사진=경기도극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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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극단 ‘갈매기’는 깎은 듯한 절벽에 둥지를 틀고 알을 낳아 새끼를 기르는 갈매기와 그 알을 훔치는 인간들의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연극을 하고 있는 ‘성녀’의 이야기가 나란히, 끼어들고 참견하면서 혹은 중첩되어 전개된다. 연극과 연극을 만들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가 나란히 전개되는 이러한 형식이 낯선 것은 아니다. 그런데 ‘갈매기’는 이 두 개의 이야기가 잇닿아 전개되면서 이야기가 완성되어 간다기보다는, 허구를 빌어 허구를 부수며 나아간다.
알을 낳아 기르는 갈매기들이, 성녀의 이야기에서 그대로 후배 배우로 등장하고, 다시 성녀의 베란다 에어콘 실외기에 둥지를 튼 비둘기들이 된다. 그뿐만이 아니다. 마치 말잇기 놀이를 하는 것처럼 안톤 체호프의 ‘갈매기’에 등장하는 니나의 대사 “나는 갈매기”를 읊조리고 성녀는 ‘갈매기’ 니나의 한 장면을 연기한다. 갈매기와 갈매기의 알을 훔치는 인간들이라는 첫 장면은 이처럼 계속 흩어져만 간다. 성녀의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성녀의 이야기는 공연을 연습하고 있는 배우에서 시작되는데, 성녀는 자꾸만 대사를 틀리고 등·퇴장을 실수한다. 아무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극장의 유령을 만난다. 노년에 이른 배우의 기억도 이렇게 흩어져 간다. 그러나 노년의 배우인 성녀는 대사를 깜빡하지만 “아주 큰 나무 하나만 들어와도”, “무지 극적인 서사가 만들어지는” 연극의 경이로움에 대한 기억은 또렷하다. 연극은 한 번 만나면 빠져나오지 못하는 구렁텅이고 헤어나오지 못하는 구렁텅이다.
| (사진=경기도극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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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러져가는 것에 대한 회한 가득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갈매기와 인간의 격렬한 부딪침에서 시작된 연극은 스러져가는 것들을 그저 밀려나 부서지는 것으로 그리지 않는다. 이 연극이 아름답다면 스러짐 역시 투쟁과 갈등의 사건들로 그려내기 때문이다. 가득 채우고 주장하지 않으면서 한껏 비워진 무대에서 허구를 부수면서.
이 연극에는 또 하나의 겹이 있다. 한태숙과 김성녀다. 한태숙은 ‘갈매기’를 쓰고 연출했고, 김성녀는 자신의 이름과 같은 ‘성녀’로 분했다. 그래서 노년의 배우 ‘성녀’의 이야기는 두 연극인들의 이야기로 겹쳐 보인다. 누구보다 화려하고 강렬한 이야기를 만들어왔던 한태숙과 바로 두 해 전 조광화의 ‘파우스트 엔딩’에서 파우스트로 분해 누구보다 화려한 연기를 보여줬던 김성녀가 만나 한껏 비워낸 채 스러져가는 것들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다니. 누구나 맞이하고 겪게 되는 스러짐에 대해 두 원로가 보여준 아름다운 이야기다.
| (사진=경기도극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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