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멱칼럼]범사의 소중함

이영주 전 춘천지검장
  • 등록 2020-05-08 오전 5:00:00

    수정 2020-05-08 오전 5:00:00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범사에 감사하라’는 성경 말씀을 좋아한다. 수십 년을 방글라데시에서 선교 활동을 하는, 아직도 어릴 때처럼 천진한 작은 오빠를 비롯해 주변에 독실한 기독교인이 많아서 더 그럴지 모른다.

개인적으로 신상에 큰 변화가 있었다. 27년간의 검사 생활을 마치고 올해 1월 퇴직했다. 임관 전 사법연수생으로 지낸 2년까지 합하면 30년 가까운 세월을,
[이데일리 김태형 기자] 이영주 전 사법연수원 부원장
사실상 대학 졸업 후의 인생 전부를 공직에서 보낸 셈이다. 퇴직 후 곧바로 직장을 구하거나 경제활동을 시작하는 대신, 공직자가 아닌 평범한 가정주부로 일상사를 챙기면서 지금까지 정신없이 달려온 삶을 되돌아보고 재충전을 하자고 마음먹었다. 건강을 위해 승용차를 타는 대신 가급적 걸어 다니고 예전 같으면 생각할 수 없는 평일 낮에 사람을 만나고 도서관에 가서 여유롭게 시간도 보낸다. 까마득한 학창시절 이후 거리를 두고 살았던 동서양 고전도 읽어보려고 공부 모임에 등록까지 했다.

코로나19의 확산은 신상 변동 후의 새로운 생활에서 당연하게 기대하던 범사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학교와 학원에 가지 않고 하루 종일 집에 머무르는 아이들의 하루 세끼를 꼬박 챙겨 먹이자니 다른 일을 할 겨를이 없어졌다. 아직 공직 마인드에서 벗어나지 못해 정부의 ‘사회적 거리두기’ 방침에 따라 한동안 외부 약속과 외출을 거의 하지 않았다. 얼마 전 동네 양재천 가에 문을 연 구립 도서관을 포함해 모든 공공 도서관이 문을 닫았다. 고전 공부 모임은 시작도 하지 못한 채 계속 연기됐다. 주로 이용하는 지하철 3호선이 종종 코로나19 확진자의 동선에 포함되곤 하니, 책상 한 자리를 얻어놓은 인사동의 선배 사무실조차 다니지 못하는 형편이다.

현재의 상황은 아이들의 일상적인 범사에도 전례 없는 일이고, 의식의 변화까지 생기는 듯하다. 작년 대학 졸업 후 미국 대학원에 진학한 장남은 해외 유학생의 대거 귀국에 불구하고 여러 상황을 고려해 현지에 계속 머물기로 했다. 학교 밖 허름한 숙소에서 온라인 수업을 들으며, 인터넷으로 주문한 마스크가 배송되지 않아 방풍 마스크 한 장으로 버티고 있다고 한다. 늦잠을 실컷 잘 수 있는 방학을 누구보다 사랑하던 막내는 개학이 수차 미뤄지다 온라인 개학으로 대체되자 학교 교실을 그리워하다 못해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니 안쓰러운 마음까지 든다.

코로나19와 무관하게 범사의 소중함을 절감하는 일도 생긴다. 몇 년 전 두 딸의 성화를 감당하지 못해 집에서 키우게 된 강아지가 한창인 나이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다리를 절룩이더니 뒷다리에 마비 증상이 왔다. 동물병원에서는 당장 디스크 수술을 받지 않으면 영영 걸을 수 없게 되고 수술을 받더라도 다시 걷게 될 확률이 절반 정도라고 한다.

적지 않은 비용을 들여, 결과가 꼭 희망적이지도 않은 수술을 받게 하는 것이 경제적인 관점에서는 매우 어리석은 일이리라. ‘찰떡이’라는 이름으로 다정하게 부르며 가족의 일원으로 여기는 두 딸의 간절한 소망을 외면하면 모녀 사이 두고두고 악영향을 미칠 것을 염려해 결국 수술을 받게 했다. 이제는 그저 수술 경과가 좋아서 찰떡이가 다시 걸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기다리는 중이다. 범사 중의 범사가 이렇게 중요한 일이 될 줄이야.

이번에 코로나19에 감염된 분들의 고통이나 치료 및 방역을 위해 헌신한 분들의 노고야 실로 형언하기 어렵겠다. 코로나19에 직접 직면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전 세계의 사람들은 평범한 일상이 사라지거나 완전히 바뀌는 것을 경험했다. 누구나 이번 일을 겪으면서 ‘잃어버린 후에 그 소중함을 안다’는 말처럼 범사의 소중함에 관해 생각했으리라.

그 사이에 집 밖은 코로나19를 전혀 걱정하지 않는 진달래와 개나리, 이어지는 벚꽃과 목련을 넘어 철쭉과 라일락의 계절이 된 듯하다. 매년 다시 찾아주는 꽃과 신록이라는 범사를 찬미함은 물론 낙엽과 나무 자체의 쓰러짐도 소중하고 감사하게 받아들일 수 있으면 이 세상은 훨씬 더 살만하다고 느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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