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과에 발전기금 10억낸 이준호 숭실대 교수

"이공계 기피?…세상은 돈이 전부아니죠"
  • 등록 2003-12-13 오전 10:30:54

    수정 2003-12-13 오전 10:30:54

[조선일보 제공] “돈으로는 얻을 수 없는 만족감이라는 것이 존재하더라구요. 세상을 사는 데는 돈이 전부가 아닙니다.” 지난 10일 자신이 재직하는 학과에 발전기금(장학금) 10억원을 쾌척한 이준호(39) 숭실대 정보과학대학 컴퓨터학부 교수는 12일 연구실을 찾은 기자가 이공계 기피현상에 대한 견해를 묻자 “돈이 최고의 가치로 여겨지는 사회풍조가 문제”라고 했다. 그는 부자다. 그는 지난 4월 대주주 지분 정보제공업체인 에퀴터블이 실시한 ‘2003년 벤처부호 20인’ 16위에 올랐다. 네이버 검색엔진 개발자인 그는 지난 2001년 자신이 주축이 돼 설립했던 검색시스템연구소 ‘서치솔루션’을 NHN에 매각하는 과정에서 서치솔루션 주식과 NHN 주식을 맞바꿨다. 그 결과 NHN 주식 42만주(5%)를 보유하게 됐다. 현재 그가 보유한 주식의 평가액은 580여억 원, NHN 주주 중 개인으로서는 이해진 NHN 사장 다음으로 많은 액수이고, NHN 공동대표인 김범수 사장보다는 많다. 그는 “돈이 많이 벌면 좋긴 하죠. 좋은 일도 하고” 했다. 갑자기 부유해진 덕에 결혼생활 10년만에 처음으로 집도 장만했단다. 그러나 7년 연애 끝에 결혼한 초등학교 동창생 아내는 그에게 “돈은 벌었을지 몰라도 예전에 연구소에서 연구할 때만큼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 박사과정을 마친 1993년부터 숭실대 교수로 임용된 1997년까지 4년간 한국과학기술원 인공지능연구센터와 연구개발정보센터(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의 전신) 등에서 연구원으로 일했다. “연구소에 있었던 시절에는 사실 고민이 참 많았어요. 연봉도 적었구요. 그러나 집사람은 그 때 제가 정서적으로는 참 안정돼 있었다고 하더군요.” 그에게 “본인도 그렇게 느끼냐”고 물었다. 그는 “연구하면 1년에 1번 정도 연구성과가 나오는데 그게 희열(喜悅)을 가져다 준다”고 했다. 그의 얼굴에 순간 미소가 감돌더니 눈이 어린아이처럼 반짝이기 시작했다. “이 세상 누구도 모르는 걸 나만 알고 있다는 것, 그게 희열이죠. 그 희열 느끼기 위해 또 연구하는 거예요. 마치 마약같아요.” 그러더니 그는 금세 우울해졌다. “그러나 요즘은 그런 게 없어요. 학생들 가르치고 회사자문해 주고 하다보니 집중해서 할만한 시간이 안 나요. 논문발표 수도 현저히 줄었죠. 그걸로 인해 받는 스트레스가 많아요. 연구소 시절 알던 친구들은 계속 연구해서 나보다 많은 지식을 쌓았는데 나는 그 사이 딴 데 눈을 많이 돌렸으니까요. ‘내가 많이 안다. 최고다’는 자부심에서 밀리다보니 창피하기도 하고. 그래서 도망가는 방법은 결국 ‘나 그동안 열심히 해서 돈 벌었다’고 이야기하는 것밖에 없고…” 그는 “결국 나는 ‘돈’에 의해 움직였다”고 했다. “회사의 재정지원을 받아 계속 연구하지 않았냐” 했더니 그는 “‘개발’과 ‘연구’는 다르다”고 했다. “연구는 돈 안 되는 게 대부분이에요. 대개 지적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거니까요. 그러나 개발은 회사와 연관돼 있으니 돈 안 되는 거 못하죠. 개발은 언제나 회사가 필요로 하는 범위까지 하고 그만이에요. 변죽만 울리다 마는 거죠. 그러나 연구는 본질을 파고 드는 거거든요.” 그는 1983년 서울대 전기계산기공학과(현 컴퓨터공학과의 전신)에 입학했다. 그는 “커트라인에 맞춰서 과를 선택했지만 그의 적성에 ‘퍼펙트하게’ 맞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그다지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다고 했다. “아버지가 약사였는데 가정형편이 좋지 못했어요. 돈 없어서 유학도 못 갈테고 대학 졸업하면 돈부터 벌어야한다고 생각했으니 그다지 공부할 필요를 못 느꼈죠. 대학1학년 때 공부에 손을 놓다보니 그만 흐름을 잃었는데 그게 2학년, 3학년이 돼서도 이어졌어요.” 그가 대학 4학년이 될 무렵 가세는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더 이상 돈벌이에 얽매이지 않아도 됐던 그는 한국과학기술원 석사과정에 진학했다. 그리고는 대학원시절 내내 고3처럼 공부했다고 했다. 그는 대학원 시절을 돌이키면서 “진짜 재밌었어요” 했다. “학부 때랑 다르게 교과과정이 실용적인 게 마음에 들었어요. 학부 때부터 좋아했던 프로그램 짜기를 마음껏 하면서 즐거워했죠. 대학 때 워낙 공부 안 해서 에너지가 남았었나봐요.” 그는 자신이 개발한 자연어 방식 검색엔진이 지난 1999년 한 신생 인터넷포탈사이트의 검색엔진으로 채택되면서 벤처산업과 처음 인연을 맺었다. 자연어 검색엔진이란 검색창에 단어가 아니라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문장을 넣어도 원하는 정보를 찾을 수 있도록 구축된 검색엔진. 10년간 정보검색이론 연구에만 매달려 얻어낸 성과물은 그렇게 처음으로 ‘돈’을 낳았다. 상아탑에서 나와 자본주의 시장의 한가운데서 달려온지 4년, 그는 “올해가 연구년이라 미국 대학에 교환연구원으로 가 있다”고 했다. 그는 “올해 약간의 여유가 생긴 것을 계기로 조금조금씩 다시 ‘연구’에 전념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며 “어쩌다보니 사업에 발을 들이밀었지만 나는 태생적으로 연구에 맞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이공계기피현상을 타파하려면 이공계를 나와서 뭘 손에 쥘 수 있는지에 대한 홍보가 많이 되어야 하지 않겠냐”며 “이공계 출신이 돈벌이로도 삶의 만족감을 느낄 수 있지만 그보다 연구하면서 얻는 만족감이 더 크다는 것을 후배들에게 몸소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그는 대학원 제자들의 석사학위 논문심사가 있어 잠시 한국에 들어온 틈을 타 기부금을 냈다. 그는 “기부금을 내야겠다고는 예전부터 쭉 생각해 왔다”며 “이공계 기피현상으로 과 커트라인이 지나치게 낮아졌는데 장학금을 준다고 홍보하면 좋은 학생들이 조금이라도 더 많이 오지 않겠냐”고 했다. 오는 20일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다는 그는 “떠들썩해지는게 귀찮아 잽싸게 해치우고 달아나려고 나름대로 ‘작전’을 짰었는데 생각보다 일이 커진 걸 보니 ‘디 데이’가 너무 일렀던 모양”이라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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