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왜 '일본 하락'에 베팅할까[김보겸의 일본in]

영국은행 상대로 공매도 전쟁 이긴 소로스
외국계 헤지펀드 시선, 英에서 日로 이동
"성장성 있는 기업, 전세계서 日에 3%뿐"
공매도 전쟁 1라운드 BOJ勝…지속성은 글쎄
  • 등록 2022-08-01 오전 7:17:15

    수정 2022-08-01 오전 7:17:15

[이데일리 김보겸 기자] 30년 전 ‘헤지펀드의 대부’ 조지 소로스는 영국 파운드화 하락에 베팅했다. 당시 영국이 하던 ‘환율조절 메커니즘(ERM)’은 파운드화가 6% 넘게 떨어지면 중앙은행이 금리를 올리도록 되어 있었는데, 인위적 개입에는 한계가 있다는 판단에서다. 결과는 영국 국부를 흡수해 10억달러어치를 벌어들인 소로스의 성공.

1992년 영국은행을 상대로 공매도 전쟁서 승리를 거둔 ‘헤지펀드 대부’ 조지 소로스.(사진=AFP)


때아닌 영국을 소환한 이유는 2022년 현재 헤지펀드들이 일본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소로스의 성공이 귀감이 된 헤지펀드들은 일본은행(BOJ)을 상대로 공매도 전쟁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다. 싱가포르 소재 헤지펀드인 그래티큘에셋매니지먼트는 5월 투자자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세계 국채 시장에서 가장 숏을 치기 유망한 시장은 일본”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글로벌 인플레 압박에 너나할 것 없이 금리를 올리는 상황에선 일본은행도 금리를 인상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일본 국채 가격이 떨어질 것이라는 확신이다.

세계 투자자들이 일본의 하락을 예상하고 매도에 나서고 있다. 이른바 ‘일본 팔자’(日本賣り)다. 일본 성장성에 대한 기대도 바닥을 치고 있다. 900조원의 자산 중 주로 글로벌 시장에 집중하는 미국 자산운용사 AB자산운용은 지난 27일 서울 여의도에서 하반기 시장 전망 간담회를 열고, 일본과 일본을 제외한 나머지 아시아 지역으로 나눠 성장성 있는 기업 비율을 비교했다. 전 세계에서 성장성 있는 기업의 22%는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 지역에 분포해 있으며, 일본에는 3%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미국 기업에 투자하라”는 요지의 간담회였지만, 일본을 향한 평가도 의미심장하다.

AB자산운용은 지난 27일 성장성 있는 일본 기업은 전 세계에서 3% 뿐이라고 분석했다.(사진=AB자산운용)


전 세계 투자자들이 ‘일본 팔자’에 나서는 건 돈으로 증시를 끌어올리겠다는 ‘아베노믹스’를 실시하는 동안 기업이 기초체력을 기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세계 증시 시가총액 비율에서 일본이 차지하는 비중은 아베노믹스 실시 초기인 2012년 말 7.2%에서 올해 6월말 5.5%로 하락했다. 공교롭게도 일본 상장기업들의 설비투자와 연구개발 투자 비율은 2012년 이후 하락세를 그리고 있다. 막대한 유동성에 안심한 일본 기업들이 신성장 동력 개발에 투자하려는 노력을 다하지 않았다는 의미로 읽힌다. ‘억만장자 기업인수의 왕’이라 불리는 헨리 크래비스 KKR 창업자도 “일본 경영자들은 실패를 두려워해 구조개혁을 미루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 와중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구조개혁에 나선 기업과 안주한 기업의 차이는 크다. 시작은 똑같이 전자제품 업체였지만 혼다자동차와 손을 잡고 전기차 경쟁에 뛰어든 나간 소니와 뒤처진 파나소닉이 대표적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소니는 아베노믹스가 끌어올린 증시를 기회로 삼아 증자자에 나섰고, 성장분야는 투자하고 비핵심사업은 철수한 결과, 아베노믹스를 실시한 2012년 11월부터 지난 27일까지 닛케이지수가 3.2배 오르는 동안 13.4배로 성장했다”고 평가했다. 그렇지 못한 파나소닉은 2.9배로, 지수 성장률을 밑돌았다.

요시다 겐이치로 소니 사장(왼쪽)과 미베 도시히로 혼다 사장(오른쪽)이 지난 3월4일 올해 안에 모빌리티서비스와 전기차 개발을 위한 신규 회사를 공동 설립한다고 발표했다. (사진=AFP)


다만 일본 성장성에 대한 낮은 기대를 바탕으로 ‘일본 하락’에 베팅한 헤지펀드들이 아직은 웃지 못하고 있다.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가 완강하게 금리 인상은 없다고 밝히면서다.

지난달 외국계 헤지펀드들은 4조5000억엔이라는 사상 최대 규모로 장기국채를 순매도했다. 일본은행은 한 술 더 떴다. 장기국채 금리 상한인 0.25%를 맞추기 위해 16조엔어치를 사들였다. 이 역시 역대 최고 금액이다. 결국 장기국채 이율은 발행 후 최저 수준인 0.095%까지 떨어졌고 채권 가격은 급상승했다. 공매도 세력은 평가손을 입었으며, 일본은행의 1라운드 판정승이다.

다만 일본은행이 언제까지고 국채를 사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일본 기업들이 스스로 설 수 있는 성장성을 확보하지 않고서는 지속가능하지 않은 승리라는 지적이 나온다. 일본은행의 고집스런 금융완화책이 아니라 펀더멘털을 키운 일본 기업들이 스스로의 성장 가능성을 입증할 때 ‘일본 팔자’는 멈추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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