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화 밑창 바느질 작업에 한창인 그의 이마에 구슬땀이 맺혔다.
“86 아시안게임부터 88 서울올림픽 때는 정말 대단했죠.”
그는 “잠 잘 시간 조차 쪼개가면서 일해야 했지만 그때는 정말 신명이 났다”고 돌이켰다.
1925년 서울역(당시 경성역) 인근에 피혁 창고가 생겨난 뒤 하나 둘 모인 수제화 가게들이 1970년대 중반 국내 최대 상권을 형성하면서 염천교 수제화 거리가 ‘대한민국 구두 1번지’로 불리던 시절이었다.
스무살 되던 해인 1974년 서울로 올라와 염천교에 터를 잡은 그는 손꼽히는 수제화 장인(匠人)이다.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염천교 수제화 거리는 1990년대 후반 대형 제화업체·저가 중국 제품에 밀리면서 차츰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거리를 가득 메우던 수제화 전문점들은 하나 둘 문을 닫기 시작해 이제는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서울시에 따르면 1980년대 중반 5000여곳에 이르던 염천교 인근 수제화 상점들은 현재 90여곳 만이 남아있다.
서울시는 수제화 산업 활성화를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시는 중구청, 국민대 산학협력단과 손잡고 △서울역 일대 도심 제조 산업 활성화 △구두와 시민건강을 연결한 건강도시 조성 △수제화 거리 활성화 프로젝트 △염천교 수제화 상인 협동조합 조성 등을 추진하고 있다.
이젠 좀 쉬엄쉬엄 해도 되지 않겠냐는 말에 고씨는 손사래를 쳤다.
수제화 제작 현장 옆에서는 한상익(27)씨가 큰 소리로 방문객을 불러모으고 있었다. 염천교 수제화 거리에서 몇 안 되는 ‘젊은 피’다.
지난해 수제화 거리 활성화 프로젝트에 참여했다가 수제화의 매력에 빠져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는 그는 “염천교 수제화 거리의 전통에다 젊은 감성을 더해 한층 세련된 수제화를 만들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40여년 동안 무수한 고객을 만났을 그에게 새로운 욕심이 있을까 싶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문재인 대통령을 꼽았다. 문 대통령의 새 구두를 성동구의 수제화 ‘장인’이 만들었다는 소식을 들은 뒤 자신은 등산화를 만들어 보고 싶어졌다고 했다.
“여름 휴가 때 오대산을 찾는 등 등산을 즐기신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세상 어떤 등산화 보다 튼튼한 제품을 만들어서 문 대통령께서 편하게 신고 다니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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