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는 고위공무원 특성상 이런 ‘고급 취미’가 가능할까. 그는 본인의 독서 스타일에 대해 ‘자투리 독서’라고 설명했다. 누구에게나 주어진 시간은 똑같은데 활용하기 나름이라는 것이다. 지난 16일 서울지방조달청에서 정 청장을 만나 그의 책읽기에 대해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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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투리 시간 활용하면 하루 반권은 읽어”
“중국 당나라의 시인 두보가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 남자는 모름지기 다섯 수레의 책을 읽어야 한다’는 말을 남겼는데 도대체 얼마나 읽어야 다섯 수레가 찰까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 시대의 책은 대나무로 만든 죽간이었으니 지금 책으로는 500권쯤 될까요? 특별히 수치를 목표로 책을 읽는 건 아니지만 열 수레 이상은 책을 읽었네요.”
그가 제대로 독서를 시작한 것은 2008년 MB정부 시절 신설된 경쟁력강화위원회에 파견을 가면서다. 중ㆍ장기적으로 해결해 나가야할 국가경쟁력 과제를 선정해야 하는 만큼 다양한 지식과 정보가 필요했다. 위원회가 광화문 KT건물에 있던 터라 점심 시간이나 퇴근 후에 바로 옆에 있는 교보문고에 자주 들렀다. 처음에는 일주일에 한권을 읽을까 말까였는데 어느새 속도가 붙었다. 1년을 돌아보니 읽은 책이 모두 101권이었다.
위원회 파견이 끝난 뒤 국방대학교 교육 발령이 났다. 교육을 받는 틈틈이 새 ‘취미’를 시작했다. 위원회 시절 독서를 하며 메모했던 내용을 리뷰형식으로 풀어 블로그에 올렸다. 사람들의 댓글이 달리고 함께 토론도 하다 보니 책읽는 재미도 배가 됐다. 2009년 독서량은 무려 212권으로 1년새 두배 이상 늘어났다.
“위원회 시절 읽은 책을 정리한 내용을 혼자 알고 있기 아까워 한 온라인서점 사이트 블로그에 글을 올리기 시작했는데 반응이 좋았습니다. 하루 평균 3만명 이상이 방문할 정도였으니까요. 사람들과 책 얘기를 공유하고 토론하다 보니 결과적으로도 저 자신도 놀랄 만큼 많은 책을 읽게 됐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책을 항상 들고 다니는 것도 다독(多讀)의 비결이다. 친구들과 골프를 치러가거나 등산을 할 때도, 심지어 국회 상임위원회에 출석할 때도 그는 책을 항상 소지했다. 기다림의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다. 정 청장은 “누가 고위공무원하면서 책 읽을 시간이 있냐고 물어보지만 절대적으로 시간을 짜내 책을 읽는 편”이라며 “새벽 다섯시에 일어나 2시간, 출퇴근 시간에 1~2시간, 퇴근 후 2시간, 기타 자투리 시간을 활용하면 하루에 책 반권은 충분히 읽을 수 있다”고 말했다.
조달청에 와서 새로 시작한 정책도 책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서울대 공대 26명의 교수가 한국 산업의 위기를 진단하고 미래방향을 제시한 ‘축적의 시간’ 서적을 통해서다.
이 책은 한국이 그간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 전략으로 조선, 반도체, 휴대폰을 척척 만들며 세계 산업을 선도했지만, 새로운 산업을 이끌어가는 ‘선도자(first mover)’ 전략이 없다고 꼬집는다. 풀어야 할 과제의 속성 자체를 새롭게 정의하고 창의적으로 해법을 제시할 역량이 부족하다는 얘기다.
선진국들은 오랜 시행착오를 통해 경험과 지식을 축적하고 숙성시켰다. 중국도 우리처럼 빠르게 성장하면서 축적의 시간이 부족했지만 넓은 내수시장을 무기로 다양한 실험을 하면서 경험을 쌓고 있다. 저자들은 우리나라도 국가적 차원에서 총력을 다해 필요한 경험을 쌓을 수 있는 체제를 빨리 구축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다.
“이 책을 보면서 우리 산업의 경쟁력을 되살리고 미래 먹거리 창출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됐습니다. 한국이 선진국 기술에 빨리 쫓아가는 전략만 있지, 새로운 원천기술이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은 팩트입니다. 선진국은 오랜 기간동안 시행착오를 거듭했고, 중국은 큰 내수시장을 통해 빠르게 경험을 쌓고 있습니다. 중간에 낀 ‘넛크래커’ 상황에서 우린 무엇을 해야할까요?”
정 청장은 조달청의 연간 55조원 규모의 공공구매력을 적극 활용하는 것을 답으로 내놨다. 신산업 육성을 위해 공공부문이 드론, 클라우드 등 미래 성장산업 제품을 선제적으로 구매하기로 한 것이다. 신산업 분야를 촉진시키기 위해 공공분야가 일종의 ‘마중물’ 역할을 하겠다는 설명이다. 그는 “신성장산업 제품을 조달청이 선제적으로 구입하면 기업은 트랙레코드를 쌓아 또 다른 투자를 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기관장이 되고나서 역할에 대한 고민도 많다. 그는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통해 영감을 받았다. 이 책은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난 의사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저자는 고통이 심한 환경에서도 살 수 있는 것은 삶에서 의미를 찾아내려고 노력이 지속될 때라고 말한다. 정 청장은 책을 읽으면서 기관장의 역할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되돌아보고 성찰해 본다고 했다.
그는 직원들과 한달에 한번씩 독서모임도 갖고 있다. 책에서 읽은 생각을 서로 공유하고, 아이디어로 발전시키는 데 긍정적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처음 시작할 때 여직원이 제가 오는 줄 몰랐다면서 도망가기도 하더라고요. 하하. 기관장이랑 하는 게 부담이 될 수도 있겠는데, 전 부담 없이 서로 소통하자는 차원에서 책읽는 분위기를 만들려고 합니다.”
“공직자, 나침반의 떨림을 알아야”
그런 차원에서 얼마 전부터 시작한 일이 있다. 독서광에서 저술가로 변신 중이다. 올해말을 목표로 공직생활 노하우를 후배한테 전해주는 ‘사람이 거울이다(공직생활설명서)’를 틈틈이 쓰고 있다. 정책 만드는 방법, 승진·인사 문제 등 공직자 생활을 하면서 보고 느꼈던 점을 담을 계획이다. 후배들이 자신이 우여곡절을 겪었던 점을 다시 반복하지 않고 더 나은 공직 생활을 하길 바래서다.
“나침반을 자세히 보면 바늘이 무엇이 두려운지 계속 떨립니다. 전 이를 내 것만 고집하지 않고 좀 더 정확하고 나은 것을 지향하는 마음이라고 해석합니다. 정책을 만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의 견해를 항상 경청하고, 자신이 맡은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항상 돌아보고 두려워하는 게 공무원의 소임일 겁니다.”
정양호 조달청장은...
경북 안동 출신인 그는 행정고시 28회로 공직사회에 발을 디뎠다. 산업통상자원부에서 산업기술정책관, 에너지자원실장 등을 역임한 산업, 에너지 전문통이다. 사내 퀴즈대회인 ‘1대100’에서 우승을 차지할 정도로 ‘똑똑이 공무원’으로서 2030에너지 신산업 확산 전략 등 굵직한 정부 정책을 수립했다. 지난 2월 산업부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조달청장으로 임명되면서 신산업 및 중소기업 육성에 힘을 쏟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