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박종오 기자] 당신은 범죄자다. 혐의가 입증된 것은 아니다. 그런데 당신과 당신의 동료를 함께 조사하던 경찰이 ‘딜’(거래)을 제안했다. 가장 먼저 자백하는 사람은 처벌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둘 다 혐의를 부인하면 경찰이 범죄 사실을 밝혀낼 가능성은 거의 없다. 하지만 동료를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 문제다. 게임이론으로 잘 알려진 ‘죄수의 딜레마’다.
건설업계가 빠진 첫 번째 늪은 ‘담합’이다. 어제의 동료가 오늘의 적으로 돌변하면서 담합 적발 건수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대한건설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공정거래위원회가 호남고속철도 공사 등 공공공사 입찰 담합 18건을 적발해 국내 건설업체 39개사에 부과한 과징금은 8496억원에 이른다. 사상 최대다. 2012년 4건(1292억원), 2013년 2건(19억원)에서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이다.
건설사들이 공사 낙찰자를 미리 정해 놓고, 투찰 금액을 짜거나 들러리 입찰을 한 사례가 대부분이다. 공정한 경쟁 대신 ‘사다리 타기’·‘제비뽑기’·‘주사위 굴리기’ 같은 방법이 동원됐다.
이런 침묵의 카르텔을 깬 것은 ‘자백’이다. 현행법상 담합 사실을 가장 먼저 신고한 업체에는 과징금(관련 매출액의 10% 이내) 100%를, 두 번째 업체에는 50%를 깎아준다. 공정위 조사 과정에서 다른 담합 사실을 신고해도 과징금을 20~100% 면제한다. 업계 관계자는 “중대형 건설사들이 ‘나부터 살자’며 리니언시(담합 자진 신고자 감면 제도) 경쟁을 벌이고 있다”며 “‘네가 고발했으니 나도 하겠다’는 보복성 신고까지 나오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실제로 공정위 자료를 보면 지난해 1~8월 사이 과징금을 부과한 담합 사건 중 리니언시를 적용한 비율은 87%(31건 중 27건)로, 2012년 54%, 2013년 82%에서 급증세를 나타냈다.
담합 적발은 올해도 줄 이을 조짐이다. 최근 담합 사실이 드러난 것은 대부분 2009~2011년 사이 정부가 집중적으로 발주한 대형 토목·환경 시설 공사다. 이 시기에 건설사들이 담합 비중이 높은 턴키(설계·시공 일괄입찰)·대안 입찰 및 최저가 입찰 방식으로 따낸 공공공사는 1150건, 88조2172억원에 달한다. 공정위는 이미 이달 초 충북 충주기업도시 폐수 처리시설 등 2009년 공공 환경시설 공사 입찰에서 담합한 한라산업개발 등 5개사에 과징금 30억원을 부과했다. 총 사업비 2조원 규모의 천연가스 주배관 건설 공사, 원주~강릉 철도 공사 등도 조사가 진행 중이다.
건설사들은 담합 업체에 가하는 중복 제재가 경영 기반을 뿌리째 흔들고 있다고 호소한다. 현재 입찰 담합한 업체는 형법, 국가 및 지방계약법, 공정거래법, 건설산업기본법에 따라 과징금 외에 공공공사 입찰 참가 제한, 형사 처벌, 손해 배상, 등록 말소 등의 처벌을 받는다. 한 중견 건설사 법무팀 관계자는 “담합한 사실이 들통 나면 각종 소송이 잇따른다”며 “이렇다보니 요즘 대형 로펌들을 건설사가 먹여 살린다는 말이 나올 정도”라고 털어놨다.
| △건설 공사 입찰 담합 제재 현황 [자료=한국형사정책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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