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과 여인 그리고 뱀…'천'의 얼굴을 보다

서울시립미술관 '영원한 나르시스트 천경자' 전
12년 만에 상설전시실 작품 교체
'천경자의 魂' 담은 시대별 대표작
24점·미공개 드로잉 최초 선보여
  • 등록 2014-08-22 오전 6:42:00

    수정 2014-08-22 오전 6:42:00

천경자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사진=서울시립미술관)


[이데일리 김용운 기자] 2012년 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와 미술월간지 ‘아트프라이스’가 공동으로 화가와 미술애호가, 관람객 5734명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했다. 가장 인지도가 높은 화가를 물었다. 그 결과 여류화가 중에서는 천경자(90) 화백이 꼽혔다. 천 화백은 전체 생존 화가 중에서도 이우환 화백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1924년 전남 고흥 출신인 천 화백은 일찍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였다.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천 화백은 그림을 공부하려고 일본 유학을 결행한다. 이 과정에서 집안의 혼담을 뿌리치기 위해 정신이 나간 척 연기를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1944년 도쿄 여자미술대를 졸업한 뒤 귀국한 천 화백은 조선총독부의 선전에 입선하며 본격적인 화가의 길을 걸었다.

이후 전남여고 미술교사로 재직하면서 뱀을 소재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보수적인 분위기가 남아 있던 1950년대 일본 유학을 다녀온 젊은 여교사가 ‘뱀’을 소재로 그림을 그리는 것은 당시로선 파격적인 일이었다. 1955년 대한미협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며 주목을 받기 시작한 천 화백은 1960년대 도쿄의 여러 유명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1967년에는 말레이시아 정부 초청 초대전에 출품하는 등 한국 대표화가로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1954년부터 1974년까지 홍익대 미대 교수로 재임하며 후학을 양성했고 50대 중반에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 되는 등 한국 화단의 중심이 섰다. 1983년에는 정부로부터 은관문화훈장을 서훈받아 예술가로서의 공로를 공인받았다. 한때 왜색풍의 그림이라며 손가락질을 받기도 했지만 특유의 정열적이고 관능적인 화풍으로 ‘꽃과 여인’을 소재로 한국 채색화의 선구자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이 12년 만에 천경자 화백의 상설전시실 그림을 전면 교체하며 지난 13일부터 ‘영원한 나르시스트 천경자’ 전을 연다. 천 화백은 1991년 국립현대미술관에 전시된 자신의 ‘미인도’에 대해 위작 논란이 불거지자 한국 화단에 염증을 느낀다며 큰딸 이혜선(69) 씨가 거주하는 미국 뉴욕으로 떠났다. 그러나 1999년 천 화백은 서울시에 194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50여년간 걸쳐 그린 작품 중 93점을 기증했다. 당시 천 화백은 기증이유에 대해 “내 그림이 흩어지지 않고 시민들에게 영원히 남겨지길 바란다”고 밝혔다.

천경자 ‘생태’(사진=서울시립미술관)


기증 작품들은 2002년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이 문을 열면서 상설전시실을 마련해 ‘천경자의 혼’이라는 타이틀로 32점을 전시했다. 이번 상설전시는 수장고에 보관돼 있던 61점을 선별해 기존의 작품들과 교체해서 마련한 것이다.

전시는 ‘내 슬픈 전설의 이야기’ ‘환상의 드라마’ ‘드로잉’ ‘자유로운 여자’ 등 4개 섹션으로 구성됐다. 작품 보존 때문에 2008년부터 사본이 걸려 있던 ‘생태’(1951)를 비롯해 ‘여인들’(1964), ‘바다의 찬가’(1965), ‘황혼의 통곡’(1995) 등 시대별 대표작을 만날 수 있다. ‘생태’의 스케치 과정을 엿볼 수 있는 ‘뱀 스케치’를 비롯해 남태평양 여행지에서 그린 자화상 ‘아피아시호텔에서’(1969)와 같은 작품들에서는 그간 보기 어려웠던 천 화백의 무채색 그림도 볼 수 있다.

천 화백은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하던 1960~80년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느꼈던 감상을 그림이 아닌 글로 써낸 수필가로도 유명했다. ‘자유로운 여자’ 섹션에서는 천 화백이 쓴 책의 일부를 발췌해 작품세계를 한층 수월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전시를 기획한 도수연 서울시립미술관 큐레이터는 “꿈과 환상에서 비롯된 정한 어린 스스로의 모습을 끊임없이 작품에 투영하는 ‘거울’과 같은 천 화백의 작품세계를 은유하기 위해 ‘영원한 나르시스트’라는 제목을 붙였다”며 “최근 몇 년간 볼 수 없던 작품 24점을 새로 걸고 천 화백 작업의 기초가 되는 미공개 드로잉도 선보였다”고 말했다. 관람료는 무료. 02-2124-8868.

천경자‘여인들’(사진=서울시립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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