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 57·130·30의 비밀은?…심상찮은 연극 3편

'레드'…57쪽 살인적인 대사량
90초만에 대형캔버스 페인팅도
'킬미나우'…쉬는시간 없이 130분 공연
장애·성·죽음 등 쉽지 않은 주제
'사이레니아'…관객 30명에만 극한전율 선사
연습실 개조 '등대'로 몰입감 배가
  • 등록 2016-06-21 오전 6:16:15

    수정 2016-06-21 오후 3:14:12

올해로 4번째 시즌을 맞이한 연극 ‘레드’의 한 장면. 단 2명의 배우가 57쪽 분량의 대사를 소화하는 것은 물론 대형캔버스를 90초 안에 붉은색으로 페인팅하기도 한다(사진=신시컴퍼니).


[이데일리 이윤정 기자] 1인다역의 연기 변신, 눈앞에서 전해오는 배우의 뜨거운 에너지, 객석의 즉각적인 반응 등. 연극이 주는 묘미는 셀 수 없이 많다. 디지털미디어가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어도 여전히 아날로그 향 물씬 풍기는 공연장을 찾는 사람이 많은 이유다.

올여름 독특한 매력으로 눈길을 끄는 연극 3편이 관객을 찾아왔다. 추상미술의 대가 마크 로스코의 작품세계와 예술혼을 다룬 연극 ‘레드’(7월 10일까지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와 성(性)과 장애, 죽음 등 쉽지 않은 주제로 국내 첫선을 보인 ‘킬미나우’(7월 3일까지 충무아트홀 중극장 블랙), 지난해 초연해 흥행기록을 쓴 ‘카포네 트릴로지’를 연출한 제스로 컴튼의 또 다른 연극 ‘사이레니아’(8월 15일까지 대학로 TOM 연습실A)다.

그런데 이들 세 작품에는 각각의 개성만큼이나 특별한 숫자의 비밀이 숨어 있다. 57, 130, 30. ‘살인’적인 대사량, 뮤지컬과 맞먹는 공연시간, 입장을 허가한 관객 수가 바로 그것이다.

△대본 쪽수만 ‘57’

“깊이있는 작품이지만 배우에게는 참 못된 작품이기도 하다. 미술사를 읊는 건 물론 화가들에 대한 이야기를 쉴 새 없이 풀어내야 한다. 방대한 대사량과 철학적인 사유 때문에 많이 힘들다.” 지난해에 이어 이번 앙코르무대를 올린 연극 ‘레드’에서 마크 로스코 역을 맡아 열연 중인 배우 한명구의 하소연이다.

‘레드’는 다양한 붉은색의 향연으로 추상표현주의의 절정을 보여준 미국 현대미술의 거장 마크 로스코와 가상인물인 그의 조수 켄의 대화만으로 구성한 2인극이다. 2009년 런던에서 초연했고, 이듬해 ‘제64회 토니어워즈’에서 최우수작품상을 비롯해 주요 6개 부문을 휩쓸며 최다 수상의 영예를 안은 작품이다. 국내에서는 2011년 초연했다.

로스코와 켄, 2명의 배우가 100분간 소화하는 대사의 분량은 57쪽에 달한다. 그 대사를 통해 두 사람은 미술과 음악, 문학과 철학을 넘나들며 팽팽한 논쟁을 이어간다. 렘브란트, 잭슨 폴락 등 중세부터 당대에 걸쳐 화가들의 예술세계를 논하는가 하면 “자식은 아버지를 몰아내야 해. 존경하지만 살해해야 하는 거야” 같은 예술가의 철학적 고뇌도 보여준다.

두 배우는 2.8m×1.8m 크기의 대형캔버스를 ‘1분 30초’에 맞춰 온통 붉은색으로 칠하기도 한다. 90초 안에 이 작업을 완성하기 위해 페인팅 수업을 받은 것은 물론 작은 동작까지 꼼꼼하게 동선을 맞췄다고 한다.

연극 ‘레드’의 한 장면(사진=신시컴퍼니).


△쉬는 시간 없이 공연만 ‘130’분

보통 연극의 공연시간은 70~100분. 중간에 쉬는 시간이 따로 없는 장르의 특성상 2시간을 넘어가는 작품은 많지 않다. 하지만 연극 ‘킬미나우’의 경우는 다르다. 130분(2시간 10분) 동안 쉬지 않고 극을 진행한다. 공연시간이 100분인 소극장 뮤지컬이 있는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긴 시간이다.

제작사 연극열전은 “원작의 대본 자체가 워낙 길다 보니 자연스럽게 극이 길어졌다”며 “원작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에 충실하려 했다”고 설명했다.

‘킬미나우’는 캐나다 극작가 브레드 프레이저가 2014년 발표한 최신작이다. 성(性)과 장애, 죽음 등 쉽지 않은 주제를 솔직하고 대범하게 풀어놨다. 선천성장애로 평생 보살핌을 받으며 살아왔지만 이제는 성인이 되고 싶은 아들 조이, 그 아들을 위해 자신의 삶을 포기한 채 헌신해왔지만 이제 더 이상은 그럴 수 없는 아버지 제이크가 겪는 갈등을 그린다.

장애로 인한 신체적 제약과 복잡한 심리를 표현하는 배우의 열연을 통해 작품은 삶에 대한 인간의 의지를 말하고, 또 인간다운 삶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묻는다.

연극 ‘킬미나우’의 한 장면(사진=연극열전).


△단 ‘30’명에게만 입장 허용

연극 ‘사이레니아’는 작품이 의도한 극한의 전율을 전달하기 위해 단 30명의 관객만 관람하도록 입장을 제한했다. 공연장소도 일반무대가 아닌 공연장의 연습실을 개조해 만든 밀폐된 공간이다. 극의 배경이 되는, 사방이 모두 벽으로 막힌 등대의 내부를 실감 나게 표현하기 위해서다. 배우는 손을 뻗으면 닿을 만한 좁은 무대에서 극을 시작하고, 관객은 마치 자신이 등대 안에 있는 것과 같은 기분으로 자연스럽게 배우의 감정을 따라간다.

작품은 1987년 폭풍우가 몰아치던 어느 수요일 영국 남서쪽 콘월해역에 위치한 블랙록 등대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블랙록 등대지기 ‘아이작 다이어’가 의문의 구조 요청을 남긴 채 실종되기 전 스물한 시간의 일을 그린다.

제작사 측은 “밀폐된 공간에서 관객이 극한의 몰입감과 긴장감을 느낄 수 있도록 일부러 협소한 공간을 찾았다”며 “30명의 관객은 사라진 등대지기 다이어와 함께 망망대해 한가운데에 표류해 있는 듯한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연극 ‘사이레니아’의 한 장면(사진=스토리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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