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부는 6일 미국 정부로부터 5·18 민주화운동과 관련해 미국 측 문서 사본 21건을 전달받았다고 밝혔다. 21건 문서 가운데는 12·12 사태 발생 사흘 후인 1979년 12월 15일 전 사령관이 월리엄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대사와의 면담에서 “12·12사태는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사건 수사과정에서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의 조사 필요성이 요청돼 체포과정에서 벌어진 일로 군사 쿠데타는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군부대 동원은 적법한 명령에 대한 정 총장 측의 저항에 따른 불가피한 조치였다”며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정 총장을 체포하려고 했으나, 이를 대통령이 거절하여 승인 없이 정 총장을 체포했다”고 언급했다.
신군부 핵심 세력이자 미국통인 김윤호 소장(1군 사령관) 역시 1980년 1월 26일 글라이스틴 대사와 만나 12·12사태의 불가피성을 강력하게 주장하며 이는 고질적인 부패, 비전문성 등으로 오염된 군 조직을 쇄신할 기회가 됐다고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김종필 총재가 비록 정부 내에는 김대중의 복권에 대한 강한 반대 기류가 있지만, 자신은 그의 복권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밝힌 것이 눈길을 끈다. 그는 또 현재의 계엄령이 가능한 빨리 해제돼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1981년 봄 선거를 언급하기도 했다.
실제 김종필 총재뿐만 아니라 김영삼 총재 역시 그해 신년사를 통해 개헌을 통한 신속한 정권 이양을 주장했다. 최 대통령은 홀부르크 차관보와의 통화 다음날인 1월 18일 새해 기자회견에서 자신이 직접 개헌안을 발의해 국민투표에 부치겠다고 했다. 그러나 실질적인 개헌 움직임은 없었고 5·17 쿠데타로 서울의 봄은 좌절됐다.
이는 5·18 광주민주화 운동을 촉발시켰는데, 사실상 미국정부가 실권은 군부가 잡고 있다는 판단하에 군부의 무력진압을 묵인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이번 문서 공개를 통해 재확인됐다. 1980년 5월 26일 최광수 대통령 비서실장이 윌리엄 글라이스틴 당시 주한 미국대사를 면담하는 자리에서 계엄군 투입 결정을 알리며 이는 사전 통보 없이 이뤄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