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공단 수난史…남북 경색때마다 '볼모' 취급

남북교류의 상징으로 2000년 첫삽
2004년 첫 가동 이후 2016년 폐쇄 전까지 통행금지만 3차례
  • 등록 2019-05-20 오전 5:00:00

    수정 2019-05-20 오전 5:00:00

개성공단 전경 (출처=이데일리DB)
[이데일리 김호준 기자] 남북교류의 상징으로 2004년 가동을 시작한 개성공단은 남북관계와 한 배를 탄 운명이었다. 남북관계가 흔들리면 개성공단도 흔들렸다.

개성공단은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으로 싹을 틔웠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으로 체결된 ‘6·15공동선언’을 계기로 같은 해 8월 현대아산과 북한 측은 개성공단 개발합의서를 체결하고 착공에 들어갔다. 2002년 제2연평해전으로 잠시 남북관계가 흔들렸지만 2004년 6월 첫 입주계약을 시작으로 2004년 12월 첫 생산품 출하에 성공했다. 18개사로 출발한 개성공단은 폐쇄 직전 123개사까지 규모를 키웠다.

그러나 보수정권이 들어서고 남북관계가 경색되면서 개성공단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2009년 3월 북한은 한미연합훈련 ‘키리졸브’를 문제삼아 개성공단 통행을 차단했다. 이듬해인 2010년 천안함 피격사건과 연평도 포격 도발 사태가 일어나자 우리 정부는 개성공단으로의 출경을 차단하기도 했다.

2013년 2월 북한은 3차 핵실험 단행하고 4월에는 공단 내 북한 근로자를 철수시켰다. 결국 개성공단은 4개월간 문을 닫아야만 했다. 이후 남북은 7차례 협상 끝에 가까스로 재가동에 합의했지만 개성공단은 남북관계라는 살얼음판 위를 계속 걸어야만 했다.

결국 2016년 1월 북한이 4차 핵실험을 단행하자 박근혜 정부는 2월 10일 개성공단을 전면 폐쇄했다. 당시 정부는 안보우선론을 내세우며 공단 내 북한 근로자 임금 중 약 70%가 핵·미사일 개발에 사용된다고 설명했다.

이에 개성공단 입주기업들은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를 구성하고 공단 재가동을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비대위는 개성공단 폐쇄 이후 3년 3개월 동안 지속적으로 정부에 방북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해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으로 한반도에 훈풍이 불자 개성공단 재가동에 대한 기대치도 높아지기 시작했다. 실제로 정부는 지난 10월 개성공단 시설점검을 위한 방북 계획을 북한 측과 협의 중이라고 발표하기도 했다.

결국 8전 9기 끝에 지난 17일 통일부는 개성공단 기업인들의 방북을 승인했다. 개성공단기업협회 관계자는 이번 방북에 대해 “남북 고착국면을 타개할 수 있는 레버리지 역할을 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남북관계에 휘둘려만 온 개성공단이 이번에는 남북관계를 휘어잡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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