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섭 칼럼] ‘워커힐 밀담’ 막전막후

  • 등록 2018-03-02 오전 6:00:00

    수정 2018-03-02 오전 7:38:55

워커힐호텔이 남북대화의 무대로 처음 등장한 것은 남북적십자회담이 진행되던 1972년 9월의 일이다. 북한 대표단을 맞아 조선호텔에서 본회담이 개최됐고, 양측 대표단의 만찬이 여기서 열렸다. 그 전 달인 8월 평양에서의 첫 회담에 이어 서울에서 후속 회담이 열렸을 때다. 한반도 분단 이래 양측 대표단이 공식적으로 평양과 서울을 교차 방문한 최초 사례였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를 띠고 있었다. 만찬 자리라고 준비가 소홀할 수는 없었다.

흥미로운 것은 그때 북한 대표단이 보여준 반응이다. “하필이면 이런 곳에 저녁 자리를 마련했느냐”라며 장소 문제를 따지고 나선 것이다. “호텔 이름이 6·25동란 때 우리 조선 사람을 살육한 미제국주의자 워커 장군의 이름을 땄다는데 우리를 여기로 안내한 것은 다른 속셈이 있는 게 아니냐”는 항의였다. 치열했던 체제 경쟁으로 인해 어떤 핑계로든 꼬투리를 잡아야 하는 처지였다.

이에 대한 우리 측 이범석 대표의 대꾸가 돋보인다. “남한 대표단이 보름 전 평양에 갔을 때 ‘스탈린 거리’에 갔었다. 스탈린은 사람을 얼마나 죽였는가”라는 몇 마디 반격으로 북측의 기세를 일거에 꺾어 버렸다. 어느 북한 대표가 “지방에 있는 자동차들을 서울로 옮겨오느라 애 먹었겠다”고 비아냥대자 “그렇다. 저 많은 건물들을 옮겨오느라 더 힘들었다”는 즉흥 응수로 상대방을 꼼짝 못하게 만든 주인공이 바로 이범석이었다. 그가 뒤에 통일원장관을 거쳐 외무장관을 지내던 도중 북한이 꾸민 아웅산테러 사건의 희생자가 됐다는 사실 자체가 상징성을 지닌다.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워커힐호텔이 남북 관계에서 다시 눈길을 끌고 있다. 김정은 위원장의 특사였던 김여정을 비롯해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 등이 묵어갔기 때문이다. 이들이 공식석상에서 우리 정부 책임자들과 나눈 얘기보다 여기서 비공식적으로 이뤄진 접촉에 더 관심이 쏠리는 상황이다.

그러나 워커힐호텔을 북측 인사들의 숙소로 내준 데 대해 보수진영 일각에서 거부감을 드러내는 것도 사실이다. 워커 장군을 추모하는 호텔에 적군 수뇌부를 맞아들인 게 가당치 않다는 논란이다. 이미 46년 전 여기서 저녁식사를 했던 남북적십자회담 북측 대표단의 불만과 똑같은 이유이면서도 입장은 정반대로 나타난 셈이다.

남북기본합의서 및 한반도비핵화 공동선언이 타결된 1991년 12월의 제5차 남북고위급 회담이 워커힐호텔에서 열렸다는 사실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당시 연형묵 정무원 총리를 포함한 북측 대표단이 여기 묵으면서 회담에 임했던 것이다. 그 비핵화 약속이 북한의 일방 파기로 한반도 위기가 고조된 현실에 비애감이 클 수밖에 없다. 주한미군에 배치됐던 전술핵이 이 공동선언을 계기로 철수했으나 북한은 오히려 미국 본토까지 위협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렇게 본다면 북측 인사들을 워커힐호텔에 묵도록 했다거나 막대한 투숙비를 지급했다는 것은 지엽적인 문제에 불과하다.

북한 대표들이 서울에 체류하는 동안 대화가 이어졌으나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평양 초청 외에는 속 시원한 대답을 얻지 못했다.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을 비롯한 외교·안보 책임자들이 워커힐호텔을 찾아 여러 얘기를 나누고도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해 계속 노력하겠다”, “미국과 대화의 문이 열려 있다”는 원칙론적 언급만이 간접화법으로 전해졌을 뿐이다.

그런데도 외부와 차단막을 친 채 저자세로 일관한 정부 처사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천안함 폭침사건의 주모자 의혹이 쏠리는 김영철에 대해서도 유족들의 목메인 원성을 한 마디도 전달하지 못했다. 송영무 국방장관이 “김영철의 방한은 군 입장에서는 불쾌한 사안”이라고 입장을 밝힌 정도다. 지난날 북측 대표들의 면전에 훈계를 서슴지 않던 이범석 대표의 재치와 기개가 새삼 아쉬워진다.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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