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교북동에 위치한 48가구 규모의 동아아파트에는 커다란 현수막이 나부끼고 있다. 이 아파트는 돈의문뉴타운 사업으로 ‘경희궁 자이’가 들어선 후 일조권 침해에 시달린다며 지난해 말 이 현수막을 내걸었다. 동아아파트의 높이는 11층에 불과하지만 이 아파트 바로 옆 경희궁 자이는 19층 높이에 달한다. 따라서 동아아파트 저층의 경우 하루 종일 경희궁 자이의 그림자에 가려진다는 게 입주민들의 주장이다.
최근 서울 도심권 주택 재건축 사업으로 고층 아파트 준공이 잇따르면서 ‘일조권’ 분쟁도 덩달아 늘고 있다. 고층 아파트 인근 주민들은 햇볕을 쬘 수 없다며 고통을 토로하고 있다. 고층 재건축을 추진하는 조합원들 역시 일조권 민원 해결을 위한 부담금 증가에 불만을 쏟아내고 있다.
일조권 따라 집값도 오르락 내리락
일조권은 아파트 매맷값에도 영향을 미친다.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통계에 따르면 일조권 분쟁을 겪고 있는 교북동 동아아파트는 지난 2월 전용면적 59㎡(8층)가 3억8000만원에 팔렸다. 지난해 8월 같은 면적·같은 층이 3억9800만원에 거래된 것을 감안하면 오히려 하락한 셈이다. 인근 K공인중개소 관계자는 “경희궁 자이가 들어서면서 주변 아파트 매맷값도 상승하고 있는데 바로 옆에 있는 동아아파트는 다소 소외된 모습”이라고 말했다.
헬리오시티 역시 마찬가지다. 헬리오시티는 동부센트레빌에 보상금을 지급하고 공사를 재개할 전망이지만 보상금, 공사 지연으로 인한 사업비 등 금전적 부담도 지게 됐다. 인근 S공인 관계자는 “시세가 오름세인데다 조합비가 남아 있어 보상금을 지급하는 데 문제가 없다”면서도 “503동의 공사가 정지된 상황이다 보니 입주 시기(내년 말)에 제대로 입주할 수 있느냐고 묻는 조합원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늘어나는 고층 건립에 소송도 급증
이승태 법무법인 도시와 사람 대표는 “재건축·재개발 조합이 수익성에만 매물돼 사업을 집행하다 보니 일조권 문제가 불거진다”며 “조합이 소송에서 패소하면 조합원 모두 더 큰 손해를 보게 된다”고 말했다. 조합이 건축 계획을 세울 때부터 주변 아파트 주민의 입장을 청취하고 인근 건물에 대한 일조권 침해 정도를 시뮬레이션하는 등 의견 수렴 절차가 필요하다는 게 이 대표의 설명이다.
일조권 분쟁이 늘면서 관련 법규의 재정비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높다. 현행 건축법은 9m가 넘는 건물을 지을 때 북측에 인접한 대지로부터 건물 높이의 절반 이상을 떨어지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대법원의 판례는 동짓날 오전 9시~오후 3시까지 연속 2시간 이상 또는 오전 8시~오후 4시까지 일조 시간이 통틀어 4시간 이상 되도록 하고 있다. 이 때문에 시행사가 건축법령에 맞게 설계해 인허가를 받았다 해도 주변 주택에 동짓날 기준 연속 2시간 햇볕을 쬘 수 없다면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 건축주들은 이미 지자체로부터 건축 허가를 받고 공사를 진행하고 있는데 법원이 일조권 침해를 이유로 공사를 중지하라 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다며 소송을 제기하는 경우가 많다.
심교언 건국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건축법과 판례가 서로 다른 기준을 적용하고 있으니 혼란이 올 수밖에 없다”며 “재건축·재개발 사업이 앞으로도 계속 이뤄지는 만큼 오래된 법령을 일관성 있게 정비해 일조권 침해의 기준을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