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덕현의 끄덕끄덕]'파친코'가 되살린 한국인의 초상

  • 등록 2022-04-14 오전 6:15:00

    수정 2022-04-14 오전 6:15:00

[정덕현 문화평론가] “돈이 아이라 정이지. 세상에 정이라는 게 있다는 것도 알아야 되는 기다. 그래야 강하게 크는 기다.” 애플TV+ 오리지널 시리즈 <파친코>에서 선자 아버지(이대호)는, 시장통에서 어린 선자가 물고기를 파는 아저씨의 흥정을 도와 돈을 받은 일에 대해 걱정하는 아내 양진(정인지)에게 그렇게 말한다. 양진은 딸이 너무 일찍 이재에 눈을 뜨는 걸 걱정하는 것이지만, 선자 아버지는 그게 돈이 아니라 마음과 마음이 오가는 정이라고 일축한다. 실제로 선자 아버지는 ‘인간의 도리’를 중요시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하숙집에서 지내는 뱃일하는 어부들과 형님 동생하며 인간적으로 어우러지는 사람.

그런데 세상에 정이 있다는 걸 아는 일이 어떻게 사람을 강하게 만들까.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하는 이 드라마에서 선자 아버지가 그걸 행동으로 보여준다. 하숙하는 아저씨들이 거친 뱃일 끝에 돌아와 ‘뱃노래’ 한 자락에 술기운을 빌어 더러운 세상을 한탄할 때, 그 소리를 듣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던 양진과 달리 함께 밥숟가락 떴던 그들을 인간적으로 이해하고 믿어주는 모습이 그렇다. 물론 돈돈 하는 세상이고, 입 바른 소리 한 마디 해도 잡혀가고, 그걸 듣고 가만있었다는 이유로도 끌려가는 세상이었다. 그래서 총칼을 앞세워 아저씨의 소재를 추궁하는 일제 앞에서 두려운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사람 간의 정이 있어 선자 아버지는 끝내 모르는 일이라 발뺌한다. 아마도 일제강점기를 보낸 대부분의 조선인들이 그렇게 버텨냈을 게다. 두렵긴 해도 그 두려움을 이기는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도리를 지켜내는 것으로.

한국계 미국인 작가 이민진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드라마 <파친코>는 1920년대 일제강점기와 1980년대를 오가며 그 격동기를 살아낸 선자(김민하, 윤여정)와 그가 이어나간 4대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유독 눈에 띠는 건 1920년대를 배경으로 등장하는 여러 한국인들의 초상이다. 물론 이민진 작가 역시 당대를 직접 겪은 세대는 아니기 때문에 그 한국인의 초상이 실제 모습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그런 모습은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독특한 위치에 서 있는 작가의 시선이 투영된 한국인의 초상일 게다. 이 작가는 미국에서 살아오면서, 또 이 작품을 쓰기 위해 실제 재일동포나 재미동포를 취재하면서 부모세대로부터 물려받은 한국인에 대한 인상을 작품에 녹여냈을 테니 말이다.

<파친코>가 담아낸 1920년대를 살았던 한국인들의 모습은 선자 아버지처럼 가난하고 많이 배우진 못했지만 사람 간의 정이 있고 가진 걸로 차별하지 않으며 당당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이런 모습은 비록 뱃일을 하며 선자네 집에서 하숙하는 어부 아저씨들에서도 느껴지고, 하다못해 시장통 쌀집 주인 할아버지에게서도 느껴진다. 일제 때문에 함부로 쌀을 팔 수 없게 됐지만 고국을 떠나는 딸에게 이 땅에서 난 쌀로 밥 한 끼를 해주고픈 엄마의 마음을 알게 된 할아버지가 선뜻 쌀을 내주는 모습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정이 그렇다.

선자의 엄마 양진 역시 박복한 삶 속에서도 자신과 가족의 생존만큼 타인의 삶을 중요하게 여기는 인물이었다. 고생만 하다 돌아가신 어머니와 술로 세월을 보낸 아버지 때문에 동생을 챙기며 거지처럼 빌어먹고 자랐던 양진은 언청이(구순열)라 장가 못간 하숙집 아들이었던 선자 아버지와 혼인해 살아간다. 그런데 양진은 장애와 전혀 상관없이 남편을 사랑했다. 그래서 아이를 셋이나 잃은 끝에 끝내 선자를 얻었다. 양진은 그래서 마치 끈질긴 생명력을 가진 인물로 그려진다. 가난한 삶이지만 손이 커 하숙하는 아저씨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게 저녁상을 내주는 정이 있는 사람이었고, 의원도 손 쓸 수 없다던 이삭(노상현)을 간병해 끝내 살려낸 인물이기도 했다.

<파친코>에서 1920년대를 살아간 선자의 부모 세대들의 모습이 중요한 건, 선자가 이 격동기를 버텨낼 수 있었던 저력이 바로 그들이 가졌던 자존감이나 당당함, 정 같은 데 있었다는 걸 드러내고 있어서다. 시간이 흘러 선자는 할머니가 됐고, 손주인 솔로몬(진하)은 일본에서 태어나 미국의 회사를 다니며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이 희미해졌지만 그래도 그 본질적인 부분들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땅을 팔지 않는 재일동포 할머니를 설득하기 위해 솔로몬은 심지어 선자의 도움까지 이용하려 하지만, 마지막 계약서에 사인을 앞두고 “이래도 사인을 해야 하냐?”고 묻는 할머니에게 “사인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것이 자신의 해고사유가 될 수도 있지만 그 할머니의 한 맺힌 사연을 들으며 솔로몬은 감히 사인하라 말하지 못한다. 지나치게 자본주의에 물들어 물신화된 인물처럼 보였던 솔로몬이었다. 하지만 선자가 “넌 착한 아이”라며 “내가 그렇게 키웠다”고 말하는 모습에서 어떻게 이들의 정체성이 시대가 바뀌어도 여전히 변치 않고 지켜져 왔는가가 드러난다.

<파친코>에서 병으로 먼저 세상을 떠난 선자 아버지는 선자에게 ‘부모 될 자격’에 대한 이야기를 유언처럼 남긴다. “옛날에는 내 팔자가 왜 이리 모진가 할 때가 있었다. 오만천지 다 행복해도 내랑은 평생 먼 얘긴지 싶었데이 그런데 니 엄마가 내게 오고 니도 생겼지. 그라고 보니께 팔자랑 상관이 없는 기라. 내가 니 부모될 자격을 얻어야 되는 거더라. 선자야. 아버지가 강해져갖고 세상 더러분 것들 싹 다 쫓아버렸으니까 아인나 니도 금세 강해질 거다. 나중에는 니 얼라들도 생기겠지. 그 때 되면 니도 그럴 자격이 되야 된다. 선자 니는 할 수 있다. 나는 니를 믿는다.” 선자 아버지가 말하는 ‘부모 될 자격’은 아마도 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숙제처럼 남겨진 질문일 게다. 나라가 힘이 있어야 백성도 있다는 뜻으로도 읽히는 그 말이, 일제강점기, 한국전쟁을 거쳐 개발시대를 넘어 격동기를 살아오며 희석됐던 한국인의 초상을 다시금 떠올리게 만든다. 가진 건 없어도 정이 있고 인간의 도리를 알아 당당했던 그 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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