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구로구 개봉동에 정착한 ‘미얀마 난민 부부’의 아내 두큰녕(32)씨. 2015년 처음 한국에 온 지 7년이 지났지만 한국어 실력은 아직 어눌하다. 한국어를 제대로 배울 곳이 없어 몸으로 부딪히며 배운 간단한 단어로 간신히 일상생활을 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먼 거리에 있는 시장에 가기 위해 대로변까지 나와서 잡은 택시에서 기사가 이렇게 되묻는 것도 일상이다. 임신 8개월 차로 어느덧 한국에서 셋째 출산을 앞두고 있지만 이 난민 부부에게 복지정책은 먼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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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국적의 두큰녕씨는 2015년 민주화 항쟁 여파로 국내 정세가 불안해지자 남편을 따라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결혼한 남편이 돈을 벌겠다며 한국으로 떠난 직후 첫째 아들의 임신을 확인하곤 한국행을 결심한 그녀는 다행스럽게도 한국에서 남편과 함께 난민 인정을 받았다. 뿌리 깊은 단일민족주의 탓에 특히나 깐깐한 한국의 난민 심사를 통과한 것이다. 2015년 한국 난민신청자 5711명 중 난민인정자는 단 105명으로, 난민인정률이 2%가 채 안된다.
바늘구멍을 뚫었지만, 한국의 삶은 평탄치 않았다. 국제결혼으로 꾸려진 가정과 비교해도 차원이 다른 장벽에 부딪혔다. 내외가 모두 한국의 말글을 모르는데다 정부와 지자체의 지원에도 차별이 있었다.
내년 1월 출산을 앞둔 두큰녕씨는 매주 수요일 산부인과 정기검진을 받고 있지만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다. 한파경보가 내려진 지난달 30일 체감온도가 영하 15도로 떨어진 맹추위 속에서도 그는 핫팩 하나 없이 무거운 몸을 이끌고 대중교통을 이용해 산부인과에 다녀왔다. 한국어는 더듬이며 배웠지만 한글을 배우지 못한 그는 미얀마 지인에게 버스 번호와 주변 풍경을 배우고 외웠다. 진료 시간은 10분 남짓이었지만 병원을 오가는 데엔 한 시간 반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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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날 딸아이까지 아이가 셋이지만 다섯 식구는 전적으로 공장에 다니는 남편의 외벌이에 의존해야 한다. 두큰녕씨는 임산부인데다 통풍이 있어 임신 전에도 일을 하지 못했고, 각 7살과 6살인 아들을 돌볼 사람도 없어 맞벌이를 할 수 없다.
생활고는 당연지사다. 소고기를 좋아하는 자녀들을 위해 집 근처 정육점을 서너 개 지나쳐 40분 거리의 독산동 우시장에서 두 달 치 고기를 산다. 광명전통시장은 조금 더 비싸 편이라 멀더라도 저렴한 시장으로 간다. 장을 본 뒤 택시를 탄 두큰녕씨는 “임신하기 전엔 버스 타고 다녔는데 애기 있어서 지금은 택시 타요”라며 “택시비 나오니까 한 번에 많이 사놔야 돼”라고 했다.
그럼에도 그는 고국으로 돌아가기보단 한국에서의 안정적인 정착을 바라고 있다. 무엇보다 한국어, 한글 배움이 절실하다고 했다. 집안에선 아이들도 오롯이 미얀마 언어를 쓰기 때문에 부부가 한글 문맹으로 겪는 어려움 외에도 아이들의 정체성 혼란과 학업 부진이 걱정이라고 했다. 두큰녕씨는 “내가 한글 배워야 아이들도 가르쳐주는데... 어디서 가르쳐주는지, 어떻게 가는지 모른다”고 토로했다.
그는 한국언어를 배워 한국 시민권을 얻고 싶다고 했다. 그는 “피부색이 달라서 학교에서 ‘한국인 아니야’라고 놀림 당하니까 아들도 스트레스가 좀 있는데 시민권이 있으면 당당해질 것 같다”며 “나중에 남편과 내가 세상을 떠나더라도, 한국 시민권이 있으면 아이들 두고 마음 편히 떠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김연주 난민인권센터 변호사는 “난민인정자는 기본적으로 국민과 동등하게 복지혜택을 받을 권리가 있지만 현장에서 잘 시행되지 않는다”며 “난민을 담당하는 법무부가 복지 안내 등 프로그램을 체계적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