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직장인 A씨는 며칠 전 배달로 끼니를 때운 날 받은 찜찜함을 지울 수 없었다. 배달원(라이더) 헬멧에 부착된 블랙박스와 눈이 마주친 탓이다. 오토바이 주행 과정을 영상으로 녹화하는 기기다. 배달의민족 배달 로봇에 탑재된 카메라는 이동 과정을 찍어 회사로 보낸다. 이동에 도움을 받으려는 것이다. 이때 로봇을 스치는 이들 모습도 함께 넘어간다. 당사자는 얼굴이 노출되는지 인지하기도 어렵다.배달 오토바이 운전자를 중심으로 헬멧 블랙박스가 보편화하고 있다. 헬멧 블랙박스는 차량용보다 가격이 저렴한 편이고 탈부착이 쉬워 분실 염려가 덜해 선호 대상이다. 기기는 헬멧에 붙여 배달원의 시선으로 주행 영상으로 녹화한다. 기기별 사양은 차이가 있지만 짧게 4시간에서 길게 8시간 넘게 연속 녹화가 가능하다. 녹화 버튼을 껐다 켜는 식으로 배터리 사용량을 조절하면 하루 노동 과정을 영상으로 남기는 데 무리 없는 수준이다.
| 주행 중인 배달 오토바이. 기사 내용과 관련 없음.(사진=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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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 블랙박스는 레저용으로 쓰였는데 현재는 영업용(상용) 시장으로까지 확산하고 있다. 물론 확산 속도에 한계는 존재한다. 블랙박스 구입 자체만으로 비용이기 때문에 도입을 머뭇거리는 요인이다. 저사양 제품은 수십만원대에서 저가가 형성돼 있다. 녹화 시간과 영상 화질 등 스펙이 올라가면 가격도 상승한다.
다만 도입은 점진적이지만 추세로 자리할 여지가 있다. 블랙박스가 `비용`이라기보다 `호신용`이라는 인식이 배달원 사이에서 정착한 결과로 해석된다. 분쟁은 운행뿐 아니라 배달 과정에서 점주와 고객 사이서 잠재적으로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분쟁을 원만하게 해결할 수단으로서 헬멧 블랙박스가 떠오르는 것이다.
| (그래픽=이미나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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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이 과정에서 주문자의 은밀한 개인정보가 고스란히 노출된다는 점이다. 블랙박스 녹화 기능을 켜고 대면으로 음식을 배달하는 상황을 가정하면 주문자의 △신체(얼굴 등) △주거지 △주거 구성원 △주문 품목 등이 예사로 노출된다. 신용카드 번호 등 금융 정보가 담길 여지가 있다. 비대면 거래가 잦아졌다고는 하지만 대면 거래도 일상적으로 이뤄지는 터라 우려를 가볍게 넘기기 어렵다.
배달 로봇도 개운치 않기는 마찬가지다. 배달의민족(우아한형제들)의 자율주행 배달로봇 ‘딜리드라이브’는 이동 과정을 영상으로 찍어서 회사로 보낸다. 회사는 영상을 송출 받아 배달 오류를 바로잡고 안전 사고와 범죄를 예방한다. 물론 우아한형제들은 ‘개인정보 처리방침’을 정해두고 해당 영상을 녹화(보관)하지 않고 ‘즉시 파기’한다. 다만 남기지 않는 것이지 노출되는 사실은 변함없다. 배달 산업의 필요에 따라서 영상을 수집하는 과정에서 타인(소비자) 권리 보장이 소홀해지는 것이다. 영상이 배달원이나 배달업체 사익을 목적으로 수집되기에 공익적 가치를 띠는 것으로 보기도 궁색하다.
| 배달의민족이 경기 수원 광교 일대에서 시험 운행중인 자율주행 배달로봇 ‘딜리드라이브’(사진=우아한형제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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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 주문 시 사전 고지하는 방편이 거론되지만 산업적 측면에서 보면 달갑지는 않다. 주문 자체를 꺼리는 요인이 될 수 있어서다. 배달원에게 선택적 녹화의 중요도를 일깨우는 사전 대처도 뒤따라야 한다고 입을 모으지만 개인의 의지에 달린 사안이라서 변수가 크다.
주문자의 정보노출 우려에도 불구하고 한편에선 ‘배달 영상’이 산업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란 목소리도 있다. 블랙박스 장착으로 이륜차 운행이 지금보다 준법적으로 이뤄질지가 최대 기대 요인이다. 운행 기록이 남기 때문에 운전자 스스로 탈선할 염려가 적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 경찰관의 바디캠에 비유하자면 범죄 전후 사정을 헤아리는 수단인 동시에 독직폭행(공무원의 폭행 등 범죄)을 예방하는 효과도 기대되는 것과 비슷하다. 배달업체의 자율주행 기술도 마찬가지다. 영상을 활용하면 자율주행 기술을 고도화하는 데에도 보탬이 되고 오류를 바로잡아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전문가들은 현재 당사자가 이해 충돌이 낮은 단계이기 때문에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는 적기로 꼽고 있다. 한 배달업계 관계자는 “주문자는 라이더의 헬멧 블랙박스 존재와 자율주행 배달로봇의 영상 송출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게 태반”이라며 “다만 배달원의 안전사고와 범죄예방 효과 등의 긍정적 측면도 있기 때문에 정부와 해당 사업자 등이 나서 주문자의 정보유출 위험을 선제적으로 차단하는 제도적 기반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