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섭 칼럼] ‘탈출구’가 막힌 사회

  • 등록 2017-12-29 오전 6:00:00

    수정 2017-12-29 오전 8:02:23

이제 며칠밖에 남지 않은 마지막 달력을 바라보며 지난 한 해를 생각한다. 뜻했던 대로 살아 왔는지, 어느 만큼이라도 이루기는 했는지 여러 생각이 교차하게 된다. 하지만 올해도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세월의 흐름에 맡겨져 무기력하게 살아 왔음을 문득 깨닫는다. 세모(歲暮)의 거리 풍경이 어딘지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다. 새해를 맞는 기대감이라고 유별날 것도 없다.

눈길을 가까운 주변으로 돌려보아도 대체적인 분위기는 크게 다르지 않다. 저마다 책상머리에 새해 달력을 걸어놓았을 텐데도 세월이 바뀌는 데 대해 도무지 감흥들이 없어 보인다. 오랜 세월의 굳은 상처에서 비롯된 무관심일까. 열심히 노력하고도 이루지 못한 데 대한 스스로의 배신감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잔뜩 기대를 하면서도 차가운 현실에 마주쳐야 한다는 두려움이 왜 없을까 싶다.

최근 대형 사고가 연달아 터져나온 것도 심드렁한 분위기를 부채질한다. 낚싯배가 전복되고 스포츠센터에 화재가 났어도 구조의 손길이 감감한 게 우리 사회의 모습이다. 종합병원 인큐베이터실에서는 갓난아이들이 영문도 모른 채 소중한 생명을 잃었다. 크레인 사고도 끊이지 않는다. 세월호 참사 이후 도심을 점령했던 노란 리본의 행렬이 무색할 뿐이다. “도대체 이게 제대로 된 나라냐”는 아우성조차 공허하다.

그런데도 마땅히 책임져야 하는 사람들은 생색내기에만 분주하다. 정치인들도 책임의식은 엿보이지 않는다. 선거 때의 약속이 거짓말인 줄은 알았지만 이번에도 비슷한 일이 반복되는 중이다. 사우나에 갇혀 유리벽을 통해 바깥 사람들을 빤히 바라보면서도 탈출구를 찾기 어렵다면 그것이 바로 생지옥이고, ‘헬조선’이 아니겠는가. 핵전쟁과 지진만이 무서운 게 아니고, 생존가방을 준비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도 아니다.

정치판의 끊임없는 싸움박질도 국민들을 무기력하게 몰아가고 있다. 상생과 타협, 소통의 정신은 찾을 수가 없고 이전투구의 막말 행진이 이어진다. 그동안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요소들이 적폐로 몰리고 있다는 점도 허탈하다. 과거 정권부터 추진돼온 사업 중에서 평창올림픽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적폐로 분류된 마당이다. 이러한 적폐청산 작업이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 하니, 가치관의 혼란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기존의 가치 척도가 헝클어지면서 공동체 인식을 잃어가는 것이 서글픈 현실이다. ‘혼밥’이 일상화되고, 웬만하면 술도 혼자 즐긴다고 한다. 다른 분야가 제대로 굴러간다고 장담하기도 어렵다. 최저임금을 올리고, 근로시간을 단축하고,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한다고 하는데도 반색하는 건 당사자들뿐이다. 이러한 정책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지도 지금으로는 미지수다.

우리 사회의 앞날을 떠맡아야 하는 젊은이들이 자기만의 밀실에 칩거해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심각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업 일선에서 눈코 뜰 새 없이 뛰어다녀야 하는 시기에 고시방에 틀어박혀 하급 공무원 시험에 매달려야 하는 신세라면 세상이 곱게 보일 리도 없다. 결국 무기력과 무관심이다. 공시생들은 그나마 형편이 나은 편이다. 부모에게 용돈을 타 쓰며 오락실에나 드나드는 청춘들의 뒤틀린 심사를 헤아리기는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이래서는 사회 활력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결혼을 하지 않고, 결혼해도 아이를 낳지 않는다며 아무리 특단의 대책을 내놔도 소용이 있을 수가 없다. 취직을 하지 못하고, 미래에 대한 보장이 없는 상황에서 결혼은 위험한 모험이기 때문이다. 집 장만과 자녀교육도 여간한 걱정거리가 아니다.

내년엔 뭔가 달라지기를 기대할 수 있을까. 우리 사회가 한 걸음이라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사방이 가로막혀 탈출구를 찾을 수 없는 상황에서 무술년(戊戌年) ‘황금개띠 해’에 기대를 걸어 볼까나. <논설설장>

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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