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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이윤정 기자] 1999년. 소련에서 비밀리에 우주선이 발사됐다. 지구와의 통신이 끊어진 지 12년째. 우주선 ‘하모니 114’에 탑승해 있는 올레그와 카시미르는 지구와 교신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저 밑에 사람들 아무래도 우릴 잊어버린 것 같아.” 내달 11일까지 서울 명동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되는 연극 ‘한때 사랑했던 여자에게 보내는 구소련 우주비행사의 마지막 메시지’는 2명의 비행사가 우주에서 미아가 돼 떠돌고 있다는 설정에서 출발해 인간군상이 우연인 듯 필연인 듯 순간적 접속을 경험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총 35번의 장면 전환이 이뤄지는 무대에서 단연 압권은 시선을 사로잡는 화려한 LED 영상이다. 이상우 연출은 “별 볼일 없는 관객에게 별 보여주는 공연”이라고 작품을 소개했다.
△배경으로만 활용되던 영상의 ‘변신’
컴퓨터그래픽(CG)을 활용한 영상은 순식간에 장면전환을 가능케 하는 1등 공신이다. 작품에서 영상은 단순히 배경으로서의 역할만 하지 않는다. 2시간여의 공연시간 내내 적극적으로 작품에 개입한다. 명동예술극장 관계자는 “미니멀한 무대로 꾸렸기 때문에 테이블, 사다리 등 무대세트라고 할 만한 대도구들이 많지 않다”며 “중간중간 필요한 부분에만 영상을 사용하는 여타의 공연과는 달리 영상을 하나의 무대장치로 활용했다”고 설명했다.
△ 고장난 TV·빨간 꽃잎…‘소품이 말하다’
에든버러의 오래된 주택 거실. 중년의 위기를 맞은 부부 이언과 비비안은 거실의 고장 난 TV 앞에서 대화를 이어가고 있다. ”왜 저래?” “좀 고쳐봐.” 남편 이언은 아내의 말에 대꾸도 없이 이리저리 살펴본다. 실제 소품이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치지직’ 소리와 함께 그들의 몸 위로 투사되는 화면영상을 통해 추측할 뿐이다. ‘고장 난 TV’는 곧 그들의 ‘고장난 관계’를 암시한다. 별다른 일이 없었는데 어느날 홀연히 남편이 종적을 감춘 이유를 설명하는 도구다.
‘접속’을 암시하는 장치도 있다. 비비안은 이언과 대화하면서 창문을 열고 ‘빨간 꽃잎’을 떨어뜨린다. 작품의 말미에 실비아가 이언을 만나게 되는 장면. 비록 인물은 바뀌었지만 실비아는 “대화 좀 하려구요”라는 대사와 함께 ‘빨간 꽃잎’을 날린다. 이 연출은 “서로 관계없는 장소들도 사실 더 멀리서 바라보면 다 연결돼 있다고 말하는 작품”이라며 “서로 관계하고 소통하자는 제언이기도 하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