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칼럼] 정말 동메달에 '그친' 걸까요

  • 등록 2014-02-27 오전 7:00:00

    수정 2014-02-27 오전 7:00:00

[이윤지 아나운서]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소치동계올림픽이 막을 내리고 선수들이 귀국했다. 올림픽의 특성 자체가 순위가 매겨지는 대회라지만 금메달을 딴 선수와 그렇지 못한 선수에 대한 관심도는 차이가 크다. 금메달을 딴 선수는 꽃목걸이를 두른 채 금의환향했지만 그외 선수들은 사진조차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

‘값진 동메달을 획득한 박승희’, ‘박승희, 안타까운 동메달’. 여자 쇼트트랙 500m에서 박승희 선수가 동메달을 딴 뒤 실린 기사 제목 중 두 가지만 뽑아봤다. 한 기사에서는 값지다고 표현했고, 다른 기사에서는 안타깝다고 말한다. 금메달을 딸 수 있는 상황에서 영국선수의 반칙으로 넘어졌기 때문에 아쉽다는 표현을 썼을 것이다. 하지만 씁쓸함을 감출 수 없다. 제목에서도 금메달 지상주의의 여운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올림픽 때만 되면 기사에 유독 인색한 언어표현이 넘쳐난다. 4년 동안 큰 관심 없던 이들의 우리 선수에 대한 평가는 ‘아, 짜다.’ 심석희 선수의 1500m 은메달도 마찬가지였다. 은메달이란 게 전 세계에서 2등을 한 엄청난 것 아닌가. 하지만 금메달을 ‘놓쳐’ 활짝 웃지 못했다는 표현이 눈에 띈다. 이런 분위기에서 선수들은 지난 4년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메달을 따지 못해 죄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과거 개그프로그램에서 유행했던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란 말이 떠오른다. 이 말이 5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것을 보면 1등을 선호하는 사회분위기는 여전한 것 같다. 우리도 올림픽을 하나의 축제로 즐길 수는 없을까. 올림픽 때마다 1등 지상주의에서 벗어나자는 목소리가 나오지만 이렇다 할 해결책은 보이지 않는다. 아마 우리사회에 만연해 있는 성장만능주의가 스포츠에도 투영된 탓일 것이다. 당장 사회분위기를 바꿀 수 없다면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이 말 한마디, 표현 하나부터 조금씩 개선해 나가는 건 어떨까. 단어 사용의 간단한 변화만으로도 한 사람을 춤추게 할 수도, 고개를 숙이게 할 수도 있다.

며칠 전 한 지인이 말로 입은 상처를 이야기한 적이 있다. 고등학교 때 처음으로 국어과목에서 상장을 받고 부모님께 보여드렸는데, 영어는 못하지 않았느냐는 말씀을 하셨단다. 그때의 서운함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했다. 우리 선수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스피드 스케이팅의 모태범 선수는 지난 올림픽 때보다 좋은 기록을 냈지만 500m 경기에서 4위를 기록했다. 이를 두고 ‘메달 획득 좌절’ ‘초반에 발목 잡혀 실패’라고 표현한 헤드라인이 있었는가 하면, ‘그래도 대단하다’ ‘장하다’라고 격려한 기사도 있었다. 어떤 이야기를 들었을 때 선수가 힘을 내며 다음 올림픽을 준비할까. 노메달이라고 하기에 지난 4년 선수들의 노력은 너무나 값지고 감동적이다.

선수들은 이제 다시 평창올림픽 준비에 들어갔다. 새롭게 주목받았던 여자 컬링대표팀은 여독을 풀 새도 없이 태릉선수촌에 입소했다고 한다. 우리도 남은 4년 동안 작은 변화를 시도해보면 어떨까. ‘겨우’와 ‘무려’는 한끗 차이다. 기왕이면 용기를 주는 말을 해보자. “동계올림픽 불모지 열악한 지원 속에서도 13위를 기록한 한국 대표팀 선수 71명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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