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어제 서초동 사옥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국민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삼성서울병원이 메르스 확산을 막지 못한 데 대해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한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날은 그가 만 47세 생일을 맞은 날이었다. 부친인 이건희 회장을 이어 앞으로 삼성그룹을 이끌어갈 이 부회장이 생일 축하파티가 아닌 사과문 발표라는 눈총을 자처한 셈이다.
이 부회장은 지난 수년간 언론에 노출된 적은 있어도 공식석상에서 본인의 육성을 통해 그룹 내 현안을 밝힌 적은 거의 없다. 서초사옥 출근길이나 해외 출장길에 공항에서, 혹은 대내외 행사에서 취재진과 마주치면서 한두 마디 던진 게 전부였다. 그러던 그가 언론 앞에 섰다. 메르스 사태가 그만큼 위중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번 공식사과는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환영할 만한 일이다. 삼성서울병원은 메르스 사태 처리과정에서 응급실에 들어온 감염환자를 허술하게 관리하고 격리대상자 명단을 작성하면서 환자 보호자나 일반 방문자들을 빼놔 메르스의 2차 진원지가 돼버렸다. 의사·간호사를 포함해 8000명 가까운 의료인력을 갖춘 국내 최고 수준의 종합병원이 메르스 방역에 실패하면서 “삼성이 하면 빈틈없이 처리할 것”이라는 국민적 기대를 저버린 것이다.
삼성그룹은 연간 매출액이 380조원으로 국내총생산(GDP)의 4분의 1을 차지하고 있고 국내외 임직원만 해도 50만명이 넘는 초일류 그룹이다. 이 방대한 조직을 이끌어가야 할 이 부회장으로서는 이번 사태를 단순한 굴욕이 아닌 세계 최고기업 반열에 진입하는 성장통으로 삼아야 한다.
더 나아가 예상치 못한 ‘블랙 스완’ 사태가 앞으로도 도처에서 발생할 수 있다는 현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동안 효자노릇을 해온 스마트폰 사업이 중국 ‘샤오미(小米) 쇼크’로 주춤하고 있으며 세계 IT·가전시장에서 차세대 먹거리를 찾아야 하는 상황이다. 최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에 반대하는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와의 법정싸움에서 빈틈없는 대책을 수립하는 것도 물론이다. 이번 메르스 사태가 삼성그룹에 있어 ‘입에 쓴 약’이 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