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 신화'' 깨졌는데… ''의대 신봉'' 오히려 강해져

상위 1% 학생들, 의대·치대·한의대 ''우울한 쏠림''
전국 의·치·한(醫·齒·韓) 거친 뒤 서울대 다른 과에 지망
부모세대의 환상 큰 탓
  • 등록 2009-03-07 오전 10:26:28

    수정 2009-03-07 오전 10:26:28

[조선일보 제공] 유명 D학원이 만든 2009학년 입시 자연계 배치표. 서울대 의예과를 시작으로 59번째까지 모두 의대·치대·한의대가 차지하고 있다. 이름조차 생소한 지방 대학들도 적지 않다. 이렇게 수능 성적 상위 1% 학생들이 전국을 일주하며 이른바 '의·치·한'을 채운 다음, 60번째에야 서울대 수학교육과가 등장한다. 하지만 의·치·한에만 들어가면 장밋빛 인생이 펼쳐지는 것일까.

지난해 2월 D대 한의학과를 졸업한 왕모(여·27)씨. 1년간 인턴까지 마치고 최근 한의원 부원장(한의원에 취직해 일하는 한의사) 자리를 10여 군데 지원했으나 모두 떨어졌다. 서울 지역의 경우 부원장 자리가 하나 나면 70~80명이 지원하기 때문이다. 부원장으로 취직해도 초봉은 월 200만원 정도이고 잘해야 400만원 받는다. '파트타임 한의사' 자리도 알아보고 있지만 이것도 쉽게 자리가 날 것 같지 않다. 왕씨는 "내가 한의대에 입학할 때만 해도 부원장 자리는 쉽게 골라 갈 수 있었는데…"라고 말했다. 개업은 엄두도 못 낸다. 지난해 졸업한 왕씨의 동기 80여명 중 개업한 한의사는 5명뿐이다. 남자들은 군입대가 많다는 것을 고려해도 과거에 비하면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왕씨는 고교 3년 내내 반에서 1등을 놓치지 않은 '상위 1%'였다. 그는 "2002년 대입 때 서울대도 골라갈 수 있었는데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IMF 사태 이후 굳어진 '의·치·한 쏠림' 현상은 의사가 돈을 잘 벌고 안정적일 것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실제로 서울대 공대와 지방대 의대에 동시 합격하면 열에 아홉은 지방 의대로 간다. 현실은 어떨까.

◆망하는 의사들

경기 침체와 치열한 경쟁에 의사들 역시 힘든 시절을 맞고 있다. 의사 수는 매년 3000여명씩 늘어나는데, 의원급 의료기관 폐업 건수는 2006년 1795건에서 지난해 2061건으로 불어났다. 특히 산부인과·소아청소년과·외과·가정의학과 등은 의원 수 자체가 줄어들고 있다.

의사들의 꿈이라는 개원(開院)은 엄두조차 못 내는 실정이다. 서울 서문내과의원 김육 원장은 "요즘엔 개원했다는 얘기는 없고 폐업했다는 얘기만 들려오고 있다. 이 근처에서도 3~4곳이 폐업했다"고 말했다.

의사협회 김주경 공보이사는 "의사는 망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깨진 지 오래다. 요즘은 개업의(醫) 중 7%가 도산한다"며 "전에는 환자가 많으냐 적으냐의 문제였는데 지금은 먹고사느냐, 죽느냐의 문제가 됐다"고 말했다. 그는 "요즘 의원에 가면 의사들이 컴퓨터하고 놀고 있다"고 주장했다.

의료 전문지에는 '파산·회생 전문 변호사' 광고가 늘고 있다. 정영근 변호사는 "파산 상담을 받으려는 의사·한의사가 작년보다 2~3배 늘어났다"며 "하루 1~2명은 찾아오고, 5~6명은 전화 상담을 해온다"고 말했다.

전문의 시험에 합격해도 취직이 쉽지 않고, 몸값도 하락세다. 의료 취업 사이트 '메디컬잡'의 유동욱 이사는 "전공과목과 지역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요즘 일반의 초임은 월 400만원 정도, 전문의 초임은 월 500만원 정도"라고 말했다.

의사의 경우 일반학과 4년, 본과 또는 의학전문대학원 4년, 인턴·전공의 5년, 공중보건의 3년 등 16년을 공부한 것에 비하면 고소득이라고 보기 어려운 것이다. 의학전문대학원이나 치의학전문대학원은 1년 학비만 2000만~3000만원 든다.

의사들의 대출 연체율이 높아지자 은행들은 의사의 신용대출 한도를 축소하고 있다. 하나은행은 개원 예정의에 대한 신용대출 한도를 3억원에서 2억원으로 축소했다. 한 은행 관계자는 "의사·한의사 중 상당수가 신용불량자"라고 말했다. 빚에 허덕이다 자살하는 의사들도 속출하고 있다.

특히 한의사의 위기감이 높다. 한의원 폐업 건수는 2006년 731건에서 지난해 898건으로 높아졌다. 한의사협회 이상봉 이사는 "최근 몇 달 사이 폐업하는 숫자가 굉장히 늘어났다"며 "일부 잘 나가는 한의사들은 있지만 대체로 3분의 1 정도가 먹고사는 정도이고, 3분의 2는 어려운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그 두뇌로 다른 데 가면…"

취재 과정에서 만난 대부분 의사들은 "상위 1% 학생들이 의·치·한에 몰리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의료계의 엄살이 섞였을 수도 있지만, 경기 침체에 따른 일시적 현상만은 아니기 때문에 앞으로가 더 문제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래도 의사들이 안정적이고 수입도 많다는 반론도 있다. 서울 송파에서 개업한 치과의사 이모(35)씨는 "요즘 나에겐 '빛 좋은 개살구'라는 말이 딱 맞다"며 "황금빛 미래를 꿈꾸며 의대에 가지만 앞으로가 더 어렵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주경 이사는 "이런 현상은 10년, 20년 후에도 점점 더 심해질 것"이라며 "한국에선 비전이 없다고 생각해 미국으로 의사 시험을 보러 가는 학생들도 많다"고 말했다.

하지만 교육 현장에선 여전히 의·치·한에 대한 '장밋빛 환상'이 강하다. 부모나 교사들이 "그래도 전문 자격증이 있는데 다른 분야보다는 아직도 낫다"라는 생각에 의대를 권하고 있다. 부모들 심리에는 "공부를 이렇게 잘하는데 우리 애는 괜찮을 거다"라는 막연한 기대감도 있다고 의료계에선 지적했다.

김육 원장은 "왜 우수한 인재들이 의대에 오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며 "열심히 연구하면 천명, 만명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우수한 두뇌들이 의대에 몰리는 것은 나라의 불행"이라고 말했다. 보건복지가족부 A간부는 "현실은 달라졌는데, 부모들이 자기 세대의 기준으로 자식들에게 의대를 권하는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이상봉 이사는 "신념이 있다면 모르지만, 한의사는 돈 많이 벌고 안정적이라는 생각 때문에 오는 것은 현실에 맞지 않다"며 "1% 이내 최우수 인력은 기초과학이나 공대를 가고 상위 1~3% 정도가 의료계로 오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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