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섭 칼럼] 백마고지에서

  • 등록 2016-06-24 오전 6:00:00

    수정 2016-06-24 오전 6:00:00

백마고지 기차역의 완공으로 일반 방문객들이 중부전선 최전방까지 둘러볼 수 있게 된 것이 벌써 4년 전부터다. 과거 경원선이 끊어진 신탄리역에서 5.6㎞ 더 북쪽으로 노선이 이어진 것이다. 안보관광 코스가 마련되어 비무장지대까지 들어가기도 한다. 철책선과 금강산 철교, 철원 노동당사 등을 구경하는 코스다.

안보관광의 마지막 코스가 백마고지 전적지다. 6·25 당시 치열했던 전투 상황을 자세히 보여주는 전시관과 승전 기념탑, 전사자 충혼비 등이 세워져 있다. 전시관에 진열된 녹슨 소총과 군모에서도 전쟁터의 긴박했던 파열음이 전해진다. 전적지 누각에서 눈앞에 손짓하듯 바라보이는 백마고지의 전투 모습이다.

6·25를 치르는 과정에서 가장 참혹했던 싸움이 바로 백마고지 전투다. 휴전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져들던 1952년 10월 중공군의 공세로 시작된 고지 쟁탈전이었다. 높이 395m, 철원과 평강, 금화를 잇는 철원평야의 요충이기 때문이다. 저수지 봇물을 터뜨려 아군의 후방 보급로를 차단한 중공군은 제38군 3개 사단 병력을 앞세워 공세를 펼쳐왔다.

전세는 낮밤으로 엇갈렸다. 열흘 동안 무려 27만발의 포탄이 쏟아지는 공방 속에 고지의 주인이 24번이나 바뀌었다. 세계 전사상으로도 유례가 없을 정도다. 그러나 국군 제9사단은 피비린내 나는 혈전 끝에 고지를 지켜냈다. 중공군 가운데 사상자 및 포로로 잡힌 인원이 1만 4000여명에 이르렀다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빛나는 전과다. 우리 측에서도 적잖은 사상자를 냈다. 전사자비에 이름이 새겨진 840여명의 주인공이 죽음으로 나라를 지킨 것이다.

전체적인 피해도 결코 작지는 않았다. 전쟁을 끝내기까지 국군과 유엔군을 포함해 18만명이 희생됐고, 민간인 사상자도 100만명 가까이 이르렀다. 국토는 잿더미로 변했다. 중공군을 제외하고도 북한군 희생자가 50만명에 이르렀다는 점에서도 민족의 비극이다.

전란이 휴전회담으로 종식되고 60여년이 지나가는 지금에도 대치 상황은 현재진행형이다. 천안함 사태나 연평도 피격사태를 거론할 필요도 없다. 우리 장병들이 불철주야 만일의 사태에 대비 중인 동서 155마일 철책선에서는 확성기 선전방송이 끊이지 않는다. 백마고지 전적지 언덕 아래 논밭 주위에 둘러쳐진 흙벽의 탱크 저지선도 마찬가지다.

한때는 남북 간의 긴장관계가 풀어지는 듯도 했다. 김대중·노무현 두 대통령 당시 남북정상회담이 연달아 성사됨으로써 장벽이 금방 허물어질 것처럼 기대됐던 것도 사실이다. 당장 통일까지는 아니더라도 서로 자유롭게 오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을 부풀리기에 충분했다.

백마고지 기차역에 있어서도 군사분계선 안의 월정리역까지 9.3㎞ 구간을 연장하겠다며 대대적인 공사에 착공한 것이 지난해 8월의 얘기다. 1914년 개통되어 용산~원산 구간을 왕래하다가 6·25 전란 중 접경 구간이 끊어진 경원선 철도를 복원한다는 계획의 일환이다. 경의선과 동해선 연결공사에 이어진 3번째 남북철도 연결 구상이었다. 그러나 내년 말로 완공계획이 잡혔던 이 공사도 며칠 전 갑자기 중단되고 말았다. 남북관계의 어려움을 말해준다.

이처럼 세월이 흐르면서 6·25 전란이 어떻게 일어났고, 숱한 장병들이 나라를 지키려고 기꺼이 목숨을 바쳤다는 사실조차 점차 잊혀가고 있다. 이곳 전적지에 세워져 있는 기념비의 문구가 기억에서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세월은 모든 것을 망각하는가. 기억하는 이는 점점 세상을 등지고, 젊은이들은 무엇을 위해 싸웠는지를 되묻고 있다.” 두루미 떼가 논두렁에 내려앉는 풍경 속에서도 비극의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고 있는 것이다.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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