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마에 서서히 땀이 맺힌다. 잠시 발걸음을 멈춰 눈을 감는다. 바람이 전하는 호명(呼名)에 귀를 기울인다. 나는 제주도의 숲길 한 가운데에 서 있다. 나의 오감(五感)은 이 숲과 함께 한다. 아직 갈 길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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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념을 없애는 데엔 숲 만한 것이 없어. 특히 제주의 숲은 말이야, 기운을 북돋는 데 최고지. 그런데 그만큼 위험하기도 해. 중독성이 있거든. 너무 깊이 빠지지는 말게.”
주말이면 산행을 하는 선배의 조언을 들은 것이 화근이었다. 그 유혹을 떨치지 못해 무작정 떠났더니 눈 앞에는 어느덧 하늘을 향해 늠름하게 솟은 삼나무들이 펼쳐져 있다. 제주시 봉개동 산 78번지 절물자연휴양림.
입장료 1000원을 내고 조금 걸으니 ‘숲과 만나는 법’이라 적힌 표지판이 있다.
‘포옹하고, 악수하라. 냄새를 맡고, 소리를 들어라.’
이 곳에는 여러 개의 길이 있지만 나는 ‘장생(長生)의 숲길’을 택한다. 어른 걸음으로 대여섯시간은 족히 걸리는 왕복 22km의 길. 그래서 오후 3시 이후에는 문을 닫는다. 해가 떨어져 숲속에서 길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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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고요하다. 나는 숲과 하나가 된다. 나는 살아 있다.’
신령함이 서려 있는 ‘사려니 숲길’
절물자연휴양림에서 자동차로 5분 거리에 또 하나의 숲이 있다. 사려니 숲. 사려니는 ‘살안이’ 혹은 ‘솔안이’라고 불리는데, ‘살’ 혹은 ‘솔’이라는 단어는 신령스러운 곳이라는 신역(神域)의 산명(山名)에 쓰인다. 신의 영역. 신의 숲.
이 곳에서 나를 처음 반기는 것은 까마귀 떼다. 독수리처럼 커다란 까마귀들이 신의 사령(使令)처럼 이 숲 곳곳을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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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숲길에서는 온대림에서 볼 수 있는 거의 모든 나무들이 있다. 졸참나무, 서어나무, 산딸나무, 때죽나무, 갈꽃나무, 초피나무, 예덕나무, 머귀나무, 누리장나무, 단풍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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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신의 동물들과 나무들 사이로 걷는다는 것. 숲과 의기투합한다는 것. 한걸음, 또 한걸음 옮기는 사이 몸과 마음의 균형은 조금씩 맞춰진다. 2월 어느 날 오후 사려니 숲길엔 신의 부름을 받은 봄의 정령들이 서서히 몰려오고 있었다. 겨울의 푸석한 공기는 온데 간데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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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생과 사려니 숲길이 트레킹에 좋은 길이라면, 비자림은 가볍게 산책하기 좋은 숲길이다. 천천히 걸어도 1시간을 넘지 않는다.
제주시 구좌읍 평대리에 자리한 비자림에는 ‘천년의 숲 사랑길’이란 이름의 숲길이 있다. 살짝 ‘손발이 오글거리는’ 이름이 붙여진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 유명한 연리목이 있기 때문이다. 뿌리가 서로 다른 두 그루의 비자나무가 마치 샴쌍둥이처럼 한몸으로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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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km 사랑길은 맨발로도 걸을 수 있도록 조성돼 있다. 봄날에 손을 맞잡고 거대한 비자나무 사이로 송이와 황토를 느끼며 걷는 일은 기쁜 추억으로 각인될 것이다. 숲과 바람과 연인이 전해줬던 향기를 잊는 일은 없을 것이다.
여기서 또 유명한 것은 비자나무 우물이다. 오래 전 비자나무 지킴이인 산감(山監)들이 먹던 우물이다. 물이 귀한 제주지만 이 곳만은 항상 맑은 물이 고여 있다. 비자나무들의 뿌리가 물을 머금고 있다가 조금씩 흘려보내기 때문이다. 자연이 만든 정수기. 비자나무 정기가 온전히 물 속에 녹아있는 물. 그 한 모금에 내 안의 불순물이 사라진다.
약수에 취했든, 피톤치드(식물이 해충·세균 등에 저항하려 내뿜는 분비물) 혹은 테르펜(피톤치드와 유사한 항균성 숲속 공기 성분)에 빠졌든, 선배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숲의 늪으로 빠져드는 기분은 떨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제주의 숲길은 꼭 다시 돌아올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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