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장순원 기자] 최근 가공식품 가격이 줄줄이 오르면서 서민들의 고통도 커지고 있다. 정부의 물가안정 의지가 약해진 것 아니냐는 비판도 나온다. 그런데 정부는 느긋한 모습이다. 얼마 전까지 식품업체들이 가격을 올리려는 조짐만 보여도 물가에 부담된다며 팔을 비틀며 거칠게 압박하던 분위기와 사뭇 다르다. 기류가 바뀐 이유는 뭘까?
◇ 1%대 물가상승률‥인상 막을 명분이 없다
가격이 오른 가공식품은 밥상물가와 직결된 터라 정부에서 민감하게 관리하는 품목이다. 지난해부터 원료값이 뛰면서 식품 가공업체들이 가격을 올리려 했지만, 지금까지는 정부의 전방위 압박에 밀려 포기해야 했다. 식품업체는 가격을 올리기 전에 정부와 협의를 해 왔다는 점에서 이번에는 정부가 가격 인상에 동의했다는 시각이 많다.
정부의 기류 변화는 안정된 물가와 관계가 깊다. 지난해 중반까지만 해도 4%가 넘던 물가상승률이 올 들어 차츰 안정되자 가격을 올리지 말라고 강요할 명분이 약해졌다. 실제 지난달 서민 생활과 직결된 생활물가지수도 지난달 0.8%,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지난해 같은 기간과 견줘 1.5% 오르는 데 그쳤다. 이는 12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이다.
재정부 관계자는 “얼마 전부터 1%대 물가 상승률을 기록하는 있고, 사실상 정부가 통제하는 전기료 같은 공공요금도 오르는 판에 물가안정에 협조해 달라는 논리로 업체를 설득할 수 있겠냐”고 반문했다.
◇ 연말 애그플레이션 상륙 대비‥가격 누르면서 누적된 불만도 부담
애그플레이션(곡물가격이 오르면서 일반 물가가 상승하는 현상) 걱정이 커진 것도 영향을 줬다. 최근 밀과 콩 옥수수 같은 주요 곡물 가격은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다. 국제 곡물가격은 4~6개월 정도 시차를 두고 국내 물가에 영향을 주는데, 연말께 국내 식탁물가에 반영될 가능성이 크다. 정부로서는 가격을 누른 여파가 연말께 한꺼번에 터지는 것 보다, 물가가 상대적으로 안정된 지금 가격을 조금 올려주는 게 부담이 적다. 또 물가인상 요인이 커지는 연말께 인상을 자제해 달라는 명분도 쥘 수 있다. 정부 관계자도 “애그플레이션에 앞서 식품업체가 지금 가격을 올리면 연말께 애그플레이션이 닥쳐도 대응할 룸(여력)이 생기지 않겠냐”고 말했다.
1년 넘게 가격을 누르면서 일부 농산물 생산업자나 식품업체의 불만이 커진 것도 부담이다. 재정부 관계자는 “배추 작황을 점검하려 고랭지 배추산지를 가 봤더니 농민들이 거친 소리까지 하더라”며 “품이 많이 들고 재배여건이 달라 봄배추보다 가격이 비쌀 수밖에 없는데도 가격안정에만 초점이 맞추니 그런 것 같다”고 토로했다.다만 이명박 대통령이 20일 국무회의에서 “추석을 앞두고 물가관리를 일찍 시작해달라”고 지시했다는 점에서 정부가 물가잡기 제스쳐를 취할 공산은 크다. 장순원 기자 crew@edail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