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년 넘게 수원갈비의 지킴이로서 살아온 수원갈비문화원 김종만 원장. 그는 이제 수원갈비의 또 다른 진화를 꿈꾸고 있다.
◇ 17세 소년의 처절한 몸부림이 시작되다
그저 막연하게 무언가를 하고 싶었다. 가슴 속 깊이 끓어오르는 열정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17세의 소년은, 육신을 피곤하게 해서라도 그 열정의 실체가 무엇인지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해야만 했다.
그러던 중 ‘영화장’이라는 중화요리집이 눈에 띄었다. 가릴 것이 없었다. 그 즉시 배달 일과 설거지부터 시작하면서 ‘막연한 무언가’를 찾으리라는 설렘에 가슴이 벅차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열정의 실체를 육신의 피곤함으로 확인하기에는 현실이 너무 냉혹했다.
그러나 그의 눈에 비친 모든 것은 신기하기만 했다. 면을 만들어내는 모습도, 일정한 모양으로 무채를 썰어내는 장면도 다른 세상에서 벌어지는 손장난과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어렴풋이 열정의 실체는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 수원갈비 조리사 계보도에 이름 올려
그는 삼원가든과 수원 경남가든 등을 거치면서 갈비에 대한 지식을 다양하게 축적하게 된다. 더 이상 분식집이나 중국집을 전전하지 않아도 됐고 설거지나 허드렛일이 아닌 육부실 전문기술자로 활약하게 된 것이었다.
“수원 경남가든에서 일할 때 월 25만원을 받았지요. 당시 홀 직원이 12만원을 받았으니 꽤 많은 월급을 받았습니다. 현재 돈의 가치로 계산하면 대략 250~280만원 정도 되는 월급이었지요. 하지만 조리사라는 직업을 계속 해야 할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하는 순간도 있었습니다. 냉동된 고기를 손질하다가 손가락의 힘줄을 잘라 병원에 실려 갔던 때가 그 때지요. 육신이 힘드니 정신도 피폐해졌습니다. 그러나 40대 후반부터 꼭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조리장의 길을 그만둘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이후 가보정갈비 등 수원지역의 내로라하는 고기음식점을 거치면서 수원갈비 조리사 계보도에 이름을 올릴 정도로 남 못지않은 연륜을 쌓아갔고 1995년에는 수원지역의 요리사모임을 창립, 현재 ‘수원갈비문화원’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
◇ 궁극적인 목표는 수원갈비와 문화콘텐츠의 접목
마지막으로, 자신이 어떤 조리장이라고 생각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 그는 이렇게 답한다.
“조리장들은 저마다 특기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맛을 잘 보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요리를 잘 하는 사람이 있지요. 저는 요리를 뛰어나게 잘 한다거나 맛을 감별하는 능력이 탁월한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의 요리를 끊임없이 연구하고 각종 문화콘텐츠와 이벤트를 자연스럽게 연결시킴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 행복해집니다.”
17세 소년이 확인하고 싶었던 열정은 이제야 움트기 시작한다. 오랜 시간 숙성되었던 음식의 향만큼이나 강렬하게, 그리고 아련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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