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조선인 강제 노역 현장인 일본 니가타현의 사도 광산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결국’ 등재됐다. 제46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는 지난달 27일 인도 뉴델리에서 회의를 열고 사도 광산의 등재를 전원동의(consensus) 방식으로 결정했다. WHC가 표결 없이 21개 위원국의 전원 의견 일치 결정 방식을 채택하고 있음을 감안하면 관련 당사자이자 위원국인 한국도 반대하지 않은 셈이다. 일본 정부가 사도 광산을 세계문화유산 추천 후보로 선정하고 등재를 추진한 2021년 12월 이후 한일 외교 갈등의 또 다른 불씨로 잠복했던 이 문제는 일단 발화 직전 꺼진 모양새다.
우리 정부가 등재에 동의한 배경은 일본이 “사도 광산의 모든 노동자, 특히 한국인 노동자를 진심으로 추모한다”(가노 다케히로 주유네스코 일본 대사)며 “WHC에서 채택한 모든 관련 결정과 약속들을 명심할 것”이라고 한 발언을 주목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가노 대사의 발언 자체가 (강제 노역을 인정한)과거 약속을 그대로 이어가겠다는 것이며 한일 협상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일본 정부가 사도 광산 인근의 향토박물관 전시물에 ‘제2차 세계대전 중 1000명 이상의 조선인 노동자가 있었고 이들이 위험한 갱도 내부 작업에 일본인보다 더 많이 종사하며 가혹한 환경에서 일했다’는 내용을 명시한 것 등은 우리 정부의 동의를 얻기 위한 준비 작업의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사도를 다녀온 경험과 기억을 살려 작년 1월 관련 글(사도의 꿈과 징용공의 눈물)을 하나 썼던 필자는 유산 등재 추진 배경과 지역 사정을 보통의 한국인들보다 비교적 소상히 이해하는 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시각에서 보기에도 이번 양국 교섭엔 납득하기 어려운 대목이 하나 있다. “조선인 노동자들이 강제 노역을 했다”는 내용이 전시 시설에 명기되지 않은 점이다. 많은 한국 언론이 “피해자인 한국이 일본의 전쟁 범죄 흑역사를 묵인해 줬다”고 비판해도 할 말이 없게 됐다. “강제 노역 문구를 사용하지 않는 대신 전시 시설에서 노동 환경의 가혹함을 소개하는 방안 등을 일본 정부가 제안했고 이를 한국이 수용했다”는 요미우리 신문의 보도가 때마침 나오면서 이런 지적엔 한층 더 힘이 실리게 됐다.
17세기 일본의 최대 금, 은 산지였지만 광산들이 문을 닫은 지금 사도는 쇠락한 섬이자 빈궁한 벽촌의 하나일 뿐이다. 인구 5만여 명이 거주하는 사도시의 1인당 연소득은 2018년 212만 7000엔으로 같은 해 일본의 1인당 GDP(국내총생산)3만 9159달러에 비해 거의 반 토막이었다. 어업과 보잘 것없는 관광 수입에 근근이 의존해 온 사도가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매달린 것도 따지고 보면 관광객 유치에 도움을 받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도시와 일본 정부의 이런 계획을 소박하고 작은 소망으로만 보아 넘기기엔 한일 관계의 복잡성이 너무 무겁다. 폭발력 또한 강하다. 식민 지배의 고통과 희생, 그리고 불신이 한국인들의 뇌리에서 언제든지 재소환될 수 있는 상황에서 한쪽의 역사, 문화적 가치와 경제 여건만을 고려한 결정은 만만찮은 후유증을 낳을 수 있어서다. 양국 고위층은 물론 실무 당국 간의 협의, 협상이 투명해야 함은 물론 다수 국민이 납득할 방향으로 전개돼야 할 이유다. 이런 점에서 ‘강제 노역’의 짧은 네 글자가 명기되지 않은 것은 유감이다. 납득하기도 어렵다. 더불어민주당이 대뜸 “윤석열 정권이 전쟁범죄 왜곡에 거수기를 자처했다”고 발끈하고 나선 것(박찬대 원내대표)만 봐도 반일선동에 또 하나의 구실을 준 셈이 됐다. 많은 회담과 교섭에서 최근의 후쿠시마 처리수 협의에 이르기까지 정부 간 양해와 지도자 간 악수가 아무리 오갔다 해도 민심의 문은 쉽게 활짝 열리지 않음을 두 나라는 직시해야 한다. 한일 관계 밑바닥에 깔린 잠재적 불씨를 가볍게 넘긴 것 같아 불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