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교정상화 50년을 맞아 서울과 도쿄에서 열린 기념 리셉션에 이 병풍이 다시 나란히 등장했다. 한·일협정 체결의 의미를 되살리자는 뜻이었을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도 리셉션에 각각 교차 참석해 미래를 향한 양국 관계를 열어갈 것을 다짐했다.
하지만 지금껏 한·일관계는 험난하기만 했다. 현해탄의 물결이 잠잠하다 싶으면 여지없이 또 다른 갈등과 마찰이 불거지곤 했다. 가깝기보다는 오히려 먼 이웃이었다. 병풍의 주인공인 정철이 임진왜란의 와중에 강화도에서 쓸쓸히 죽어갔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미리부터 암시된 일인지도 모른다.
이번 리셉션 개최를 둘러싼 양측의 눈치싸움도 우여곡절로 이어졌다. 양국 정상이 리셉션에 참석한다는 방침도 막판에서야 결정됐다. 지금 상황에서 한·일 관계가 곧바로 방향을 찾아 제대로 굴러갈 것으로 기대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두 정상이 아직 정식으로 얼굴을 맺댄 일이 없다는 사실부터가 부담이다.
지금도 독도 영유권 문제를 비롯해 교과서 왜곡, 조선인 징용시설의 세계문화유산 등록 등 현안들이 끊이지 않는다. 종군 위안부 문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최근만 해도 일본 정부의 마땅한 보상조치를 외면당한 채 피해 할머니들이 연달아 세상을 떠났다.
전임 이명박 대통령은 “과거사를 호주머니에 넣어두자”며 전향적인 태도를 보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일본의 도발이 심해지면서 스스로 독도를 방문해 영유권 수호 의지를 밝혀야 했다. 그 자신 고려대 재학시절 한·일협정 반대시위에 앞장섰던 입장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양국 관계의 어려움을 실감하게 된다.
중국 박물관에 소장된 부분이 대만으로 옮겨져 전시되는 것은 문제가 없었으나 대만에 보관되고 있는 부분은 대륙으로 건너가질 못하고 있다. 행여 대륙으로 건너갔다가 압류당할까 우려하기 때문이다. 1949년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정부가 대만으로 쫓겨가면서 함께 옮겨간 고궁박물원 유물들이 모두 비슷한 처지다. 그나마 부춘산거도의 경우 당시 원자바오(溫家寶) 총리의 언급으로 잠시나마 재회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을 뿐이다.
여기에 비한다면 앞서의 성산별곡 병풍은 처지가 훨씬 자유스러운 편이다.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한·일관계가 생각보다 쉽게 풀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게 되는 이유다. 물론 일본의 진정성 있는 태도가 그 전제다. 앞으로 다시 50년이 지나고 한·일협정 100주년 기념식이 열릴 때는 진정한 이웃으로서의 관계가 정립될 수 있을 것인가.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