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예능 ‘남자의 자격’에서 개그맨 이윤석이 분위기를 띄울 요량으로 내뱉은 감탄사를 일반인 출연자가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에 호들갑이냐’는 식으로 뭉개버리자 TV를 보던 내가 민망할 지경이었다. 이윤석을 탓할 일은 아니었다. 예능의 속성상 적당한 ‘오버’는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예능이 아닌 곳에서도 ‘오버’는 넘쳐난다는 점이다. 올림픽이나 국제회의 유치에 수십조원의 경제 효과가 있다고 홍보하는 건 예사고 파업 한번에 수천억 손실 운운하는 ‘헐리우드 액션’도 일상화돼 있다. 정치권은 오버를 뛰어 넘어 금방 들통날 거짓말을 눈하나 까딱않고 해댄다. 독도를 둘러싼 한·일간 최악의 외교마찰도 따지고 보면 과열에서 비롯됐다.
짝퉁 푸어가 대거 등장하며 정작 진짜 푸어들이 설 자리를 잃었다. 여기저기서 ‘원조(元朝)’라고 외치는 통에 진짜 원조가 묻혀버린 꼴이다. 신종 푸어들의 사정이 딱하긴 하지만 그래도 ‘가진 자들’ 이었다. 그들 말고도 단칸방 사글세 낼 돈이 없고 ‘시급 알바’로 하루를 버텨야 하며 대학진학을 꿈도 못꾸는 절대 빈곤층은 넘쳐 난다. 막막한 생계때문에 ‘극단적 선택’을 하는 노인 비율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높은데 목소리 큰 사람들의 하소연만 들린다. 묵묵히 제자리를 지켜왔던 평범한 사람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푸어의 홍수에는 앞다퉈 경제적 어려움을 당장 해결해 줄 것 같은 약속을 쏟아내는 여야 정치권이 자리잡고 있다. 표를 노리고 기업을 손보겠다는 다짐도 남발되지만 기분 내키는 대로 할 일은 아닌 듯하다. 갑자기 무리하게 바꾸라고 몰아세우는 것보다 이미 갖춰진 법 조항부터 착실히 지키라고 요구하는 게 우선이다. ‘예측 불가능성’을 혐오하는 기업들을 불안하게 만들어 어떤 득(得)이 있을까.
<방송에디터 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