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가전사업의 메카였던 수원공장은 3~4년 뒤면 공장 문을 닫아야 할지 모른다. 2000년부터 냉장고·세탁기·전자레인지 등 주요 가전제품 생산 라인은 이미 해외로 생산기지를 옮겼다. 유일하게 남은 내수용 TV 생산라인(연산 150만대)도 조만간 해외로 이전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국내 대기업들이 해외로 떠나가고 있다. 점차 비즈니스의 중심 축(軸)을 해외로 옮기면서, 해외투자도 급증하는 추세이다. 이에 따라 양질의 일자리가 줄어들고, 국내 제조업이 침체하는 산업 공동화 현상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전경련 이승철 상무는 “고임금과 노사분규, 반(反)기업정서가 결합된 자연스런 현상”이라며 “과거와 달리 해외 생산기지와 국내 산업 간 연관관계도 점차 단절돼 가고 있다”고 말했다.
◆급증하는 해외투자=최근 2~3년 사이 국내 대기업의 해외투자 러시 현상은 80년대 말과 90년대 후반의 일본을 보는 듯하다. 내로라하는 대기업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대규모 해외 투자 프로젝트를 쏟아내고 있다. 포스코의 인도 오리사주 일관제철소(총 투자액 120억 달러)처럼 프로젝트 규모가 10조원을 넘는 곳도 나오고 있다.
25일 재정경제부와 수출입은행 등에 따르면 대기업들의 올 상반기 해외투자액(실제 집행 기준)은 28억7000만 달러로 작년 동기(15억1400만 달러)보다 90% 늘어났다. 이 같은 추세는 하반기에도 지속돼, 올해 전체로는 사상 최대인 50억 달러 이상을 기록할 전망이다.
◆국내와 연계 단절이 문제=90년대 중반과 2000년대 초반에도 3~5년 간격으로 해외투자가 급증했던 해가 있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해외의 싼 임금을 겨냥한 임가공 생산기지 건설이 많았다. 국내에서 원재료나 중간재를 생산한 뒤, 해외 생산기지에 보내 최종 조립 후 완제품을 수출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국내와 해외 기지가 모두 윈윈(Win-Win)하는 효과가 있다.
반면, 최근 들어서는 일관 생산체제가 통째로 이전하는 방식이 일반화되고 있다. 하이닉스반도체의 중국 우시(無錫)공장, 현대·기아차의 미국 공장, 삼성·LG전자의 해외생산기지 등이 이런 예들이다. 이 체제는 협력업체들을 대거 끌고 나가고 중간재도 현지에서 공급 받는 경우가 많아 국내 전후방(前後方) 연관산업에 대한 파급 효과를 거의 기대하기가 어렵다.
해외 각지에는 한국 대기업들의 대규모 산업단지가 속속 출현하고 있다. 폴란드(LG전자), 슬로바키아(삼성전자) 중국 우시(LS그룹) 등에는 과거 국내 공단에 못지않은 대규모 한국 공단을 형성하고 있다.
◆중화학 분야도 해외 이전 본격화=국내 장치 산업의 대명사격인 철강·조선·기계·석유화학 업종마저 해외로 떠나기 시작했다.
GS칼텍스도 6억 달러를 들여 산둥성 칭다오(靑島)에 연산 110만? 규모의 석유화학 생산공장을 건설해 올 12월부터 본격 가동에 들어간다.
◆해외 고용은 급증, 국내 고용은 침체=생산기지의 해외 이전으로 국내 고용은 정체 상태에 빠진 반면, 해외 고용은 급증하고 있다.
국내 전자업계 2위인 LG전자의 해외 직원은 작년 말 현재 총 3만6500명. 반면 국내 직원이 3만1700명으로 국내보다 해외 직원이 4800명 많다. 2002년 국내와 해외의 직원 숫자가 역전(逆轉)된 후 줄곧 해외 비중이 높다. 2003년엔 1년 만에 해외인력이 8000명이나 급증하기도 했다. 이 회사는 올해도 러시아·폴란드·멕시코 등지의 공장에서 2400명의 해외 인력을 신규 채용했다.
현대차도 2003년 6000명이었던 해외 종업원 수가 올 6월 말 현재 9800명으로 63% 급증했다. 같은 기간 국내 종업원 수 증가율은 6%에 불과, 큰 대조를 이뤘다. 포스코도 2004년과 2005년 2년 연속 해외인력 신규 채용 규모가 국내보다 더 많았다. 2004년 채용은 해외인력 800명·국내 450명이었고, 2005년엔 해외 900명·국내 400명이었다.
◆산업 공동화는 이제 시작일 뿐=국내 대기업들은 글로벌 시장 개척과 경쟁력 확보를 위해서는 해외투자가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또 정부 규제와 반(反)기업정서, 불안한 노사관계, 높은 임금 등 고(高)비용 구조 등도 원인으로 지적된다. 한진중공업 관계자는 “부산 영도 조선소 주변에서 70만평을 구하려면 감당하기 힘든 토지비가 들어갈 뿐만 아니라 각종 규제에 부딪혔을 것”이라며 “필리핀 수빅만 부지는 임대료가 저렴할 뿐만 아니라 정부와 지역사회로부터도 환영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문제는 산업공동화가 이제 시작이라는 점이다. 이우광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미·일이 ‘엔고(高)’를 합의한 플라자합의(1985년) 직후부터 대기업들이 일제히 생산기지를 해외로 이전, 심각한 산업공동화 현상을 겪었다”며 “일본에 비해 시장 규모가 작고, 중간재 자급도도 떨어지는 우리는 더 혹독한 공동화를 겪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