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정류장은 ‘서울역버스환승센터, 강우규 의거 터’입니다” 퇴근길 버스 안, 눈에 익은 노선을 따라가는데 낯선 설명이 귀에 꽂혔다. '강우규 의거 터'. 버스 안 노선도를 눈으로 찬찬히 살피다 새로 붙여진 지 얼마 안 된 정류장 명칭을 발견했다.
올해 초 서울시는 ‘3.1운동 100주년 서울시 기념사업 추진계획’의 하나로 김구·안중근·유관순·이회영·윤봉길 등 총 15명의 인물과 그 활동을 정류소에 함께 적었다. 이 버스정류장들은 각각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하거나 의거하는 등 관계가 있는 지역으로 선정됐다. 다가오는 광복절(15일), 독립운동가들의 열정과 희생이 숨쉬는 서울 도심 지역 버스 정류소들을 소개해본다.
정성욱 서울시 복지정책과 주무관은 “기존 ‘서울역사박물관(경교장)’이란 명칭에서 ‘경교장’만 보고 김구 선생이 생전에 사용한 집무실이자 암살당한 장소인지 아는 사람은 적다”라며 “3·1절이나 광복절 같은 날이 아닌 일상에서는 독립운동을 생각하기 쉽지 않은데, 자주 접하는 버스에서 독립운동가의 이름을 들으면 평소에도 독립운동을 상기할 것으로 생각했다”고 사업 취지를 설명했다.
정 주무관의 말에 따르면, 서울시는 시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1만 7000여 명 중 △활동지가 서울 주요지점일 것 △대표성을 가질 것 △여성 독립 운동가 반영 등 기준에 따라 독립 인사를 선정했다. 특히 여성독립운동가를 최대한 반영하려 한 이유로, “알려진 여성독립운동가 수 자체가 적은데 그조차 ‘누군가의 어머니’, ‘누군가의 아내’로 불리는 일이 많다”며 “여성독립운동가의 이름을 찾아주고자 하는 취지”였다고 설명했다.
어디선가 한 번쯤 들었을, 우리가 잊고 있던 독립 운동가
숙명여대 근처에는 독립인사가 병기된 정류소가 두 곳 있다. ‘효창공원삼거리 윤봉길 의사 묘역’과 ‘숙명여대후문, 이봉창 활동 터’가 그것이다. 1932년, 윤봉길 의사는 훙커우 공원에서 열린 일왕 생일 및 전승 기념식에, 이봉창 선생은 일본에서 일왕에게 각각 수류탄을 투척했다. 현재 서울효창공원에는 ‘삼의사’라 불리는 윤봉길과 이봉창, 백정기와 임시정부 요인 김구, 이동녕, 차이석, 조성환 선생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서울역을 지나 나오는 회현역 남대문시장은 ‘이회영 활동 터’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명동 YMCA 자리는 우당 이회영 선생의 대저택이 있던 곳이다. 이회영 선생과 형제들은 이 일대의 저택과 땅을 팔아 독립운동에 사용했는데,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 지도자 양성에도 힘썼으나 1932년 일본군사령관을 암살해 잡혀 고문 끝에 옥사했다.
이회영 선생의 집터 앞에는 명동성당이 있다. 만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 후 사형을 받아 순국한 안중근 의사는 그는 아버지를 따라 천주교에 입교했는데, 명동성당에 자주 방문했다고 한다. 명동성당 근처 ‘서울백병원, 국가인권위’ 정류소에 ‘안중근 활동 터’가 병기된 이유다.
종로 쪽으로 넘어가면 정세권 선생과 김상옥 의사를 만날 수 있다. ‘북촌한옥마을입구.정세권 활동 터’ 주변은 건축왕이라 불리던 정세권 선생이 조성했다. 정세권 선생은 경성 지역 개발에 힘쓰는 한편, 일제에 맞선 민족 운동에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북촌을 지나 혜화 쪽으로 가다 보면 ‘종로5가 효제동 김상옥 의거 터’라는 정류장이 나온다. 김상옥 의사는 1923년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인물이다. 당시 종로경찰서는 일본 식민통치의 상징이었다. 거사 후 잡히지 않고 은신했으나 발각되어 효제동에서 일본 경찰과 접전 끝에 자결로 순국했다. 정류장에서 혜화역 쪽으로 걷다 보면 마로니에 공원이 나오는 데 이곳에 김상옥 의사를 기억하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
김상옥 의사를 지나 혜화동 로터리는 여운형 선생이 반겨준다. ‘혜화동로터리, 여운형 활동 터’는 광복 후 좌우 합작 운동에 힘쓰던 여운형 선생이 암살된 장소다.
3·1운동부터 ‘임의침묵’, 여류 인사까지
서울 버스 정류소를 따라가다 보면 손병희 선생과 유관순 열사 등 3·1운동의 주역들도 만날 수 있다. ‘서대문경찰서, 농협은행, 유관순 활동 터’ 근처에는 유관순 열사가 다닌 옛 이화학당 터와 유관순 기념관이 있다. 민족대표 33인인 손병희 선생 주도로 독립선언이 이뤄진 태화관 터 주변 정류소엔 ‘인사동 들머리, 3·1독립 선언 터’라는 명칭이 붙었다.
우리나라 최초 독립선언서인 대한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조소앙 선생을 기념하는 정류소도 있다. ‘삼선교, 한성대학교, 조소앙 활동 터’가 그곳이다. 조소앙 선생은 삼선교에 거주했는데 1950년 총선 때, 서울 성북구에서 당선되어 제2대 국회에 진출한 바 있다.
서울시는 권기옥 선생과 김마리아 선생 등 잊혔던 여성 독립운동가도 조명했다. 권기옥 선생은 임시정부에서 활동하여 독립운동에 힘썼다. 10여 년간 중국 공군에서 비행사로 복무하는 등 당시 한국인 최초의 여자 비행사라 불리기도 했지만 이후 전 재산을 기부하고 장충동의 낡은 건물에서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장충문화체육센터, 권기옥 활동 터’라는 정류소 명칭이 붙은 이유다. 김마리아 선생은 1919년 2·8독립운동에 참가했으며, 미국 유학 중 재미 대한민국 애국 부인회(근화회)를 조직한 인물이다. 정류장 ‘김마리아 활동 터’에서 조금만 걷다 보면 선생이 졸업하고 교사로 일했던 옛 정신여고 교정 터가 나온다.
광복 74주년에도 독립운동가와 함께
서울시는 지난 2월 버스정류장에 독립운동가와 그 활동터를 병기하는 사업을 완료했다. 기존 14명이던 것에 최근 정세권 선생을 추가하여 총 15명의 독립 인사가 정류장에 이름을 올렸다. 돌아오는 광복절을 기념해 스냅타임에서 버스 정류장 독립운동가 명칭 병기에 대한 시민의 생각을 들어봤다. 서울역 버스정류장에서 만난 한 시민은 “부끄럽지만 (14명 중) 낯선 분이 한두 분이 아니다”라며 “굉장히 의미 있는 일인 것 같다”라고 말했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는 또 다른 시민은 “고등학교 교육과정에서는 다루지 않아 공시를 준비하지 않았으면 몰랐을 인물도 많다”며 “독립운동가가 대중에게 알려질 좋은 기회인 것 같다”고 말했다.
2019년 8월 15일은 광복 74주년이 되는 해다. 이제 서울 도심 속에서 독립 운동가의 이름을 들을 수 있게 된 만큼 일상에서 독립운동을 기억해보는 것은 어떨까.
/스냅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