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위기에 美 `탈규제` 역행조짐

금융·산업계에 정부 규제 감독 움직임
국민들도 "정부가 문제 해결해야 한다"
  • 등록 2008-07-28 오전 8:01:13

    수정 2008-07-28 오전 8:01:13

[이데일리 피용익기자] 미국에 불어닥친 부동산 및 금융 위기가 30년 가까이 지속돼 온 미국의 `탈규제(Deregulation)` 모토를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다.

25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기업 파산, 집값 하락, 에너지가격 급등 등으로 인해 경제가 악화되자 미국 연방정부와 주정부가 이를 해결하게 위해 팔을 걷고 나섰다고 보도했다.

경제 문제에 정부가 나섰다는 것은 지난 1980년대 초반 레이건 행정부 시절 이후 25년 넘게 지속돼 온 `탈규제` 모토가 도전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최근 규제 강화를 주장하고 있는 사람들 상당수가 레이건 전 대통령의 이념을 전승하고 있는 공화당 측 인사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 정부가 나서 시장 손본다

지난 24일 열린 미 하원 금융위원회 청문회에서는 정부 기관의 권한이 강화돼야 한다는 발언이 줄을 이었다.

청문회에서 증권거래위원회(SEC) 크리스토퍼 콕스 위원장은 투자은행의 모회사를 규제하기 위해서는 SEC가 더 많은 권한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티모시 가이스너 뉴욕 연방은행 총재도 전체적인 감독 구조의 재평가를 주장하면서 "모든 것을 다 들여다 볼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이미 월가 투자은행들에 대한 감독을 개시했다. 긴급 구제책을 통해 수천만달러를 은행권에 쏟아부은 후 연준 인사들을 해당 금융회사에 파견해 밀착 감독하기 시작한 것. 연준은 패니매와 프레디맥에 대한 구제책에 대해서도 동의했다.

다른 정부 기관들도 역할을 넓혀가고 있다. 재무부는 패니매와 프레디맥 붕괴를 막기 위해 지분을 사들이는 방안을 놓고 의회 승인을 기다리고 있고, 연방주택국은 정부보증 모기지에 대한 기준을 완화했다.

미국 국민들도 정부의 개입을 지지하고 있다. 지난 23일 발표된 WSJ와 NBC의 여론조사 결과 미국인들의 53%는 "정부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고 답했다. 반대 응답은 42%에 그쳤다. 12년 전 정부의 개입 반대 의견이 두 배 많았던 것과는 대조적인 결과다.

이에 대해 앨런 블라인더 전 연준 부총재는 "무간섭주의에 대한 반발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라며 "시장의 창조적 성격은 때로는 이상하고 위험한 방향으로 흐르기도 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 정부 규제 움직임에 기업들 당황

기업들도 과거 30년 가까이 동안 경험해보지 못한 정부의 규제 감독 움직임에 당혹스러워 하고 있다.

의회 의원들은 식품의약국(FDA)에 대해 제약 업체들을 보다 엄격하게 감독할 것을 요구하며 업계에 압박을 가하고 있다. 플로리다주는 최근 가공업체의 요구를 받아들여 토마토 재배업자에 대한 연간 점검을 결정했다.

정부의 규제가 점차 강화될 것으로 예상되는 온실가스 문제도 기업들에겐 부담이다. 집권당인 공화당과 야당인 민주당 모두 온실가스 배출 규제를 위한 연준 형태의 위원회 설치에 긍정적인 입장이다.

기업 환경에 변화가 어느 정도로 일어날 지는 내년 초 백악관의 새 주인이 누가 되느냐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민주당 오바마 후보는 부자들의 세금을 급격히 올리고, 석유회사에 초과이득세를 부과하는 방안을 언급한 바 있다. 반면 공화당 맥케인 후보는 기업 세금을 감면해줄 방침이다.

맥케인 후보는 또 파산 위기 기업에 대한 연방 기금 지원 방안에 대해서 밝히기도 했다. 그는 제너럴모터스(GM)가 판매 감소와 비용 상승으로 파산 위기에 처할 경우 연방 기금 지원을 통해 신세대 배터리 및 전기자동차 개발을 지원하겠다고 말한 바 있다.

◇ 시장과 정부의 투쟁사

개입을 둘러싼 시장과 정부의 투쟁 역사는 미국 역사만큼이나 오래됐다. 독립전쟁 영웅인 알렉산더 해밀턴은 미국 초기 제조업체들을 보호하기 위해 높은 관세를 주장했었다. 그러나 이같은 조치는 토지균등분할론을 강조한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에 의해 무너졌다.

1907년 금융 패닉은 정부의 감독이 늘어나는 계기가 됐다. 1913년에는 FRB가 설립됐고, 대공황으로 인한 시장 붕괴는 SEC와 FDIC의 등장 배경이 됐다. 미국식 자본주의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1980년대 초반 실업률과 물가상승률을 합한 고통지수(Misery Index)가 20%를 기록한 가운데 대통령에 당선된 레이건은 시장 자유화를 위해 각종 규제를 풀었다.

레이건 행정부가 기틀을 마련한 탈규제 움직임은 이후 정권에서 몇차례의 사건사고로 인해 타격을 받게 된다. 2001년 9.11 테러는 국토안전국의 거대화를 야기했고, 2000년대 초반 엔론과 월드콤의 분식회계 스캔들은 사베인-옥슬리 법 제정을 이끌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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