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노희준 기자] 2012년 10월 미국 최대 금융그룹 씨티그룹은 최고경영자(CEO) 비크람 팬디트(Vikram Pandit)가 임기 1년여를 앞두고 갑자기 사임하는 사태를 맞는다. 미 연장준비은행(FRB)의 은행 건전성 스트레스테스트에서 씨티그룹이 탈락했기 때문이다. 스트레스테스트는 고금리 고환율 등 악조건을 가정하고 은행의 대응능력을 검증하는 시험대다. 갑작스러운 CEO 낙마에도 씨티그룹은 같은달 내부승계 방식으로 마이클 코배트(Michael Corbat)를 차기 CEO로 무리없이 선임했다. 승계절차가 CEO 임기만료 2년 전부터 이미 시작된 덕분이다.
| (자료=금융당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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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금융당국에 따르면 선진 글로벌 금융회사는 씨티그룹 사례처럼 현직 CEO 임기 만료 1년여 이상을 앞둔 시점에서 차기 CEO를 선임하는 승계절차를 개시하는 사례가 많다. 실제 갑작스럽게 씨티그룹을 이끌게 된 마이클 코배트는 1983년 씨티그룹에 입사한 후 2008년부터 그룹 경영위원회에 참여하면서 ‘차기 CEO’ 상시 관리 후보군에 포함돼 5년간 경영역량을 육성했다. CEO로 선임되기 5년 전부터 상시후보군이 미래 CEO로 육성되는 것이다. 최종후보군에 선정된 후에도 마이클 코배트는 1년 10개월간 핵심시장인 유럽·중동·아프리카지역을 담당하는 등 CEO로서 ‘부족한’ 역량을 보완하기도 했다.
이는 국내 금융지주회사들이 현직 CEO 임기만료 약 2~3개월 전에 승계절차를 개시하는 사례가 많은 것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국내 (금융지주 회장 선임) 기간은 최상의 CEO를 선정하기에는 불충분할 가능성이 높다”며 “현직 CEO 임기가 만료되기 상당기간 전부터 승계절차를 개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앞서 이복현 금융감독원장도 지난 1월 우리금융 차기 회장 후임자를 선임하기 위한 절차와 관련, “차기 회장 2차 후보군(숏리스트)이 일주일 만에 결정되는 과정에서 평가에 필요한 적정한 시간이 확보됐는지 걱정이 있다”면서 국내 금융회사 CEO 선임 절차의 속도전에 문제를 제기한 바 있다.
충분한 기간을 사전에 두지 않고 차기 CEO 승계절차를 개시하다보니 도전 의사가 없다고 알려진 후보군이 여러 금융회사 CEO 후보군에 중복으로 선정되는 촌극도 빚어진다. 지난해 신한금융 차기 회장 최종 후보군(숏리스트)에 포함된 김병호 전 하나금융 부회장은 이후 CEO 도전 의사가 없는 것이 알려졌지만, 올초 진행된 우리금융 차기 회장 잠재후보군(롱리스트)에 또 포함돼 사실상 후보군 채우기에 급급한 모습이 연출됐다.
김우진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최근 보고서에서 “임원 후보추천위원회 소속의 사외이사가 검색엔진에서 제공하는 정보 수준으로 후보자 대부분을 알고 있다면 경영진 승계 과정은 정당화될 수 없다”면서 “(평상시) 후보자의 성품이나 업무 능력, 커뮤니케이션 방식이나 위기관리 대처 능력 등을 지켜볼 기회를 얻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