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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두진 서울예술대 교수] 굳이 혜공왕까지? 공연을 보고 나오며 든 첫 생각이다. 아무리 ‘삼국유사’란 고전을 바탕으로 새로운 창작극으로 만들자는 취지에서 시작된 ‘삼국유사 연극만발’이라지만 꼭 그 안의 인물이나 스토리를 무대에 올려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삼국유사’라는 700년 전 어르신들 이야기에서 얼개나 인물을 담아내면 그게 오늘날 우리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지난달 28일까지 서울 용산구 서계동 국립극단 소극장 판에서 공연한 ‘남산에서 길을 잃다’(백하룡 극본·김한내 연출)는 삼국유사의 혜공왕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독립된 작품이라 하겠다. 물론 여자 옷을 즐겼다는 혜공왕과 보조 재단사 승렬, 에밀레종의 인신공양과 순애의 죽음 또 진숙의 해고, 비천상과 순애의 꿈 등이 병렬 배치되며 역사기록을 프로젝션했지만 사실 그 연관성은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찾아야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진숙의 말대로 승렬이라는 ‘순진한 새끼’가 격변하는 시대의 소용돌이에서 허우적대다 방화로 몰락하는 이야기로 봐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젊은 시절 승렬이 약속한 경주 나들이는 현재의 나이 든 승렬과 순애의 환영이 묶여 아련한 미련처럼 자리한다. 작가는 순진하고 성실한 청년이 꿈을 정성껏 키워도 말꼬리의 파리처럼 시대에 휘둘려 몰락하는 상황을 그리며 나이 든 승렬에게 분노의 욕을 한 바가지 담아 놓았다.
승렬과 진숙, 순애의 연기 역시 넘치지 않은 균형을 유지했다. 마루 무대는 마지막 방화 장면에서 스모그와 함께 빛났다. 결국 순진한 청년의 소박한 꿈이 와해되며 몰락하는 과정은 거칠고 불친절하지만 통일성 있는 표현으로 맵시 있게 그려졌다. 역설적이지만 덕분에 ‘순진한 새끼’가 순진하게 살면서도 자신의 꿈을 이뤄가는 세상을 얼핏 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