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공무원의 '학습된 무기력', 방치할 건가

  • 등록 2012-08-27 오전 7:45:12

    수정 2012-08-27 오전 7:45:12

[이데일리 김보리 기자] “여당에서 대권 재수에 임하는 확실한 후보가 나와서 국정운영 방향과 정책을 얘기하고 다니는데, 지금 정부가 무슨 새로운 일을 벌이겠습니까? 수비나 열심히 해야죠”

기획재정부 한 간부의 시국인식이다. 푸념 섞인 그의 말에는 정권 임기말을 맞은 관가와 관료들의 무기력한 분위기가 고스란히 전달된다. 실무를 맡은 공무원들 반응도 다르지 않다. 지금 정책을 만들고, 발의를 해봐야 정권이 바뀌면 어찌될 지 모르는데 굳이 힘을 뺄 필요가 있느냐는 거다.

정권 말이면 반복되는 ‘학습된 무기력’의 단면이다. 공무원들이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움직이지 않거나(복지부동), 눈동자만 굴리는(복지안동) 행태도 배경은 다르지 않다. 과거 정부에서 재정부가 임기말에 새해 경제운용방향을 준비해 가니, 대통령이 “다음 정부에서 다 바뀔 건데, 이런 걸 뭘…”이라고 했다는 일화는 아직도 관가에 나돈다.

올해 유독 정도가 심하다. 우선 잇따른 측근 비리와 소통 부재로 대통령 스스로 레임덕을 앞당겼다. 구태의연한 행정 방식도 공무원들을 힘빠지게 했다. 물가를 잡겠다며 부처를 동원해 기업들 팔을 비틀고, ‘배추 사무관’ 같은 구시대적 조처를 내놓기도 했다. 여기에 정치 이벤트가 파고 들었다. 20년 만에 총선과 대선이 함께 치러지고, 4월 총선은 대선의 전초전이었다. 유력 대권 주자들은 표심을 얻고자 각종 공짜·반값 공약을 쏟아냈다. 이 정부가 추진하던 각종 국책사업도 입방아에 올랐다. 여당은 현 정부와 선을 그었고, 야당은 ‘잘못된 건 모두 MB정부 탓’이라며 두드리기 바빴다. 지난 4월 총선 때 이미 ‘행정 올스톱’이란 말이 나돈 배경이다.

요즘 공무원들이 일하지 않을 핑곗거리는 차고 넘친다. 관가에서는 정책 얘기는 자취를 감췄다. 정부가 의지를 갖고 추진해 온 인천공항 지분 매각, 산업은행 민영화, 수서발 KTX 운영권에 대한 민간사업자 선정 등은 모두 흐지부지되고 있다. 대신 ‘누가 어느 후보에 줄을 섰다더라’는 등의 확인되지 않은 복도발 통신이 난무한다. 정치는 살아나고, 정책과 행정은 실종되는 시절이다.

공무원들이 일하기 힘든 시기임에 틀림없다. 그렇다고 학습된 무기력을 임기말 관행으로 간주하고 아예 손놓고 가도록 놔둬서는 안된다.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이 요즘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국정은 릴레이와 같아서,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면 그만큼 다음 정부에 짐을 지운다”는 것이다. 옳은 말이다. 국정뿐만 아니라 공무원들의 자세도 그러해야 한다. 안팎으로 닥친 위기속에서 국민들 삶은 더 어려워지고 있다. 공무원 월급은 그런 국민들이 꼬박꼬박 내는 세금이다. 공무원이 ‘국민의 공복’이라는 것은 시기와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는 명제가 아니다. 학습된 무기력을 방치하는 것은 정권과 정부, 장관의 직무유기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김보리 기자 boris@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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