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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가가 살인적인 말이 베네수엘라에서는 단지 비유로 그치지 않는다. 치솟은 물가 탓에 생존을 위해 필요한 물, 식료품, 의약품조차 제대로 공급이 되지 않으면서 최근 몇 년 사이 베네수엘라 국민 10%가 자국을 등졌다. 최근에는 대규모 정전 사태가 발생해 신장 투석중이던 환자와 인공호흡기로 연명하던 환자, 인큐베이터에서 치료받던 신생아들이 대규모로 사망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마저 벌어졌다. .
그러나 ‘살인물가’의 나라 베네수엘라는 역설적이게도 ‘세상에서 가장 물가가 싼 나라’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 산하 경제분석기관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가 발표한 ‘전세계 생활비’(Worldwide Cost of Living 2018) 보고서에 따르면 133개 도시 중 베네수엘라의 수도 카라카스가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를 제치고 가장 물가가 낮은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뉴욕 물가 기준으로 산출…화폐가치 따라 물가 달라져
EIU가 물가를 조사한 방식 때문이다. EIU는 미국 뉴욕 물가를 기준점인 100으로 잡고 식품·의류·주거·교통·학비 등 160여개 상품·서비스 가격을 반영한 ‘세계생활비지수’(WCOL index)에 따라 도시 물가 순위를 매겼다. 이때 물가는 달러 단위로 환산했다.
그 결과 그 나라의 통화 가치에 따라 해당 도시의 생활비가 크게 좌우되는 결과를 낳았다. 2018년은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 긴축 기조와 미국의 경제 호황이 맞물리면서 달러화가 강세를 보인 한해이기도 하다. 상대적으로 다른 나라의 통화가치는 평가절하됐다.
결과적으로 엄청난 물가상승에도 통화 가치 하락폭이 더 큰 탓에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는 세계에서 가장 물가가 싼 도시가 됐다.
카라카스에 1위 자리를 내줬지만, 2위에 오른 시리아의 다마스쿠스 역시 2017년 기준 연 28%라는 엄청난 물가상승률에도 전쟁 혼란 속 시리아 파운드의 가치가 떨어진 탓에 달러화 환산 기준으로 물가가 뉴욕의 25% 수준에 불과했다.
물론 EIU는 “물가가 싼 도시가 살기 좋은 곳은 아니다”라고 경고한다.
EIU가 평가하는 물가 비교 방식은 뉴욕 사람들이 달러화를 들고 다른 도시에 갔을 때 느끼는 물가를 의미한다. 그 도시에서 먹고, 자고, 일하는 사람들이 체감하는 물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같은 이유로 터키 이스탄불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지난해 물가가 가장 큰폭으로 떨어진 도시로 꼽혔다. 터키와 아르헨티나는 신흥국 위기 진원지로 꼽히는 대표적인 나라로 자국 화폐 가치가 가파르게 하락했다. 반면 화폐 가치 폭락 탓에 상대적으로 수입품 가격이 올라 터의 지난해 연평균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25.2%를 기록했다.
서울 물가=뉴욕·코펜하겐…소득수준은 절반 그쳐
서울이 뉴욕과 물가 수준이 같다는 조사결과도 관심있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세계은행(WB)이 집계한 2016년 기준 우리나라 1인당 국민총소득은 2만 7600달러로 32위인 반면, 미국은 10위(5만 6810달러), 덴마크는 8위(5만 6990달러)이다. 즉, 같은 생활비를 지출하고 있지만 벌어들이는 소득은 미국이나 덴마크의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
EIU에 따르면 세계에서 생활비가 가장 비싼 도시는 프랑스 파리와 홍콩, 싱가포르로 공동 1위를 차지했다. 이어 스위스 취리히가 4위, 제네바·일본 오사카가 공동 5위였다.
생활비 수준을 결정한 160여개 품목 중 도시별 가격 편차도 눈길을 끄는 부분이다.
빵, 맥주, 남성용 정장, 여성의 헤어컷 가격 등 4가지 지표를 가지고 세계 생활비 상위권 10개 도시를 비교한 결과 서울은 빵 1kg당 평균 가격이 15.59달러로 가장 비쌌고 정장 가격도 평균 2074.03달러로 뉴욕(2729.77달러)에 이어 두 번째로 비쌌다.
맥주가격도 평균 3.13달러로 뉴욕(3.33달러), 취리히(3.25달러)에 이어 세 번째로 비싼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에 여성 헤어컷 가격은 60.13달러로 오사카(53.97달러)에 이어 두 번째로 쌌다.
EIU는 “아시아 국가는 식료품 가격이 비싼 경향이 있고 유럽의 도시는 가정, 개인 위생, 유흥 등의 가격이 더 비싼 경향이 있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