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업계 보릿고개 길어지나…90% “정국 혼란에 부정 영향”

[길어지는 벤처투자 혹한기]②비상계엄·탄핵 정국에 투자심리 위축
신인도 하락에 해외 투자유치 난항
회복 기로 섰던 시장 기대감 꺼져
유망기업에 투자 쏠려 ‘부익부 빈익빈’ 가속화
  • 등록 2025-01-13 오전 5:35:01

    수정 2025-01-13 오전 5:35:01

[이데일리 김경은 김세연 기자] 바이오 스타트업 A사는 지난달 벤처캐피털(VC) 세 곳에서 50억원의 투자를 받기로 했다. 하지만 투자 집행시점이 2~3월로 밀리면서 연초부터 사업에 차질을 빚고 있다. 대내외 경제 불확실성이 커지며 VC들이 투자금을 풀기를 망설이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A사 이사는 “4월이면 창업기업 기준인 업력 7년을 넘어 정부 지원도 받기 어려워진다”며 “5~6월 이후까지 투자가 지연된다면 존폐를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고 어려움을 호소했다. 이어 “VC 업체들은 성장이 더딘 바이오 스타트업 대신 회수가 확실한 기업을 찾는다. 정치 상황 등으로 시장도 어수선하니 더 깐깐하게 투자하고 투자 집행을 축소하는 경향이 있다”며 “투자를 철회하는 경우도 늘었다”고 말했다.


벤처·스타트업계의 보릿고개가 길어질 전망이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감돌던 시장 회복 기대감은 최근 대내외 환경이 급변하면서 다시 움츠러드는 분위기다. 올해는 경제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유망 기업에만 투자가 몰리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커질 것이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그래픽= 김일환 기자)
4곳 중 3곳 “작년 벤처투자 어려웠다”

12일 이데일리가 국내 주요 벤처캐피털(VC)과 액셀러레이터(AC), 벤처·스타트업 협·단체 20곳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조사 대상의 75%는 지난해 벤처투자 시장이 ‘부정적’이었다고 응답했다. ‘보통’이라는 응답은 25%였으며 ‘긍정적’이라고 응답한 곳은 단 한 곳도 없었다.

특히 비상계엄·탄핵 정국이 벤처 생태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나타났다.

조사 대상의 90%(18곳)는 최근 정국 상황이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답했다. ‘영향이 없다’고 응답한 나머지 2곳도 ‘향후 부정적인 영향이 예상된다’고 답해 조속한 정국안정이 벤처투자 시장 활성화에 필요한 요건으로 꼽혔다. 자본시장 불확실성으로 인해 자금을 공급하는 출자자(LP)들이 보수적인 예산 편성을 펼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대외 신인도 하락으로 해외 투자를 유치하기는 더욱 어려워질 것으로 보인다.

국내 VC B사의 파트너는 “정치적인 위기가 경제 성장률 둔화와 금융 시장 불안정을 유발할 가능성이 높다”며 “불확실성 심화로 올해 벤처투자가 위축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어 “특히 해외 투자자들의 국내 벤처투자가 지체될 것”이라며 “국내 벤처기업의 글로벌시장 확장도 위축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C사의 파트너도 “외국 투자자들이 국내 VC와 스타트업에 관심이 많았는데 정치적 리스크로 출자가 잠정 중단된 상태”라고 전했다.

(그래픽= 김일환 기자. 자료= 설문조사, 중소벤처기업부)
불확실성 확대에 투자쏠림 현상 심화

벤처투자 시장의 경색에 아쉬움이 더 커지는 이유는 벤처·스타트업 생태계가 회복 기로에 섰던 시점이어서다.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지난해 1~3분기 벤처투자액은 8조 5808억원으로 전년동기대비 11.3% 증가했다. 같은 기간 전 세계 벤처투자 규모가 전년 대비 18.6% 감소한 것과 대조적이다.

펀드 결성 규모는 8조 2024억원으로 같은 기간 4.1% 줄었지만 대형 펀드가 잇따라 조성되는 성과도 나타났다. IMM인베스트먼트와 LB인베스트먼트는 3000억원대 규모의 펀드를, DSC인베스트먼트는 2000억원 규모의 펀드 조성을 추진 중이다.

다만 대형 펀드는 초기, 신규 투자보다는 후기, 후속 투자에 집중하는 경향이 높다. 여기에 국내 정국 혼돈과 미국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글로벌 경기 부진 등 대외 변수까지 겹치면서 비교적 안정적이고 검증된 후기 기업에 투자 쏠림 현상이 나타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최근 벤처기업 D사도 최근 투자심의위원회까지 거쳤으나 최종 투자 유치가 불발됐다. 투자 시장이 보수적으로 움직이면서 높아진 심사 문턱을 넘지 못한 탓이다. 과거에 비해 수익성에 대한 심사 기준이 높아졌다는 설명이다. D사 대표는 “전보다 투자유치가 더 어렵다고 느낀다. 재무적으로 더 깐깐하게 접근하는 심사역들이 많아졌다”며 “여러 심사역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보면 새로운 투자처를 찾는 것보다 기존 투자 기업에 대한 사후관리, 후속투자에 신경을 많이 쓰더라”고 전했다.

송은강 캡스톤파트너스 대표는 “과거엔 기업이 돈을 못 벌더라도 해당 기업 서비스의 사용자나 트래픽이 많으면 성장 가능성을 보고 투자했다”며 “지금은 스타트업이라도 자금 흐름을 중요하게 본다”고 설명했다. 이어 “돈을 버는 회사에 돈이 몰릴 수밖에 없다”며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화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윤미옥 한국여성벤처협회 회장은 “지난 몇 년간 침체기였던 벤처투자 시장이 지난해에는 그나마 살아나던 추세였는데 최근 들어 이런 움직임이 멈췄다”며 “VC뿐만 아니라 벤처·스타트업도 연구개발(R&D), 신제품 출시 등이 미뤄질 수밖에 없다. 당장은 현금을 보유하고 상황을 지켜보자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그래픽= 김다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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