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평론가 송주호] 음악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언제나 있었다. 그러나 음악 청취 경험은 동일하지 않다. 과거에는 지금 연주되는 곡만을 들을 수 있어 시·공간의 제약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중세부터 최근까지 그리고 지구 반대편에서 만들어진 음악도 언제 어디서든 음반이나 네트워크를 통해 동시적으로 청취할 수 있다. 가히 혁명적인 변화다. 오늘날의 이러한 청취 경험은 모든 음악이 시공간을 초월해 우리 시대의 음악이 되게 한다. 그리고 감상자의 취향과 이에 따른 능동적인 선택이 청취의 핵심적인 요인이 되면서, 내가 듣는 음악은 곧 내 음악이 된다.
| 공연 ‘베토벤: 발트슈타인-반복’의 한 장면. (사진=김윤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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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자의 취향은 대중화를 거쳐 음악을 거대 산업으로 성장시키는 바탕이 됐다. 한편으로는 부작용도 있다. 가사가 없는 기악곡이 작품으로서 자리 잡게 한 형식과 화성, 기교 등의 전통적인 극적 양식들이 요즘 감상자의 취향과 거리가 멀어지면서다. 이러한 요소들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클래식 음악은 청취 가능성이 급격히 낮아지고 있다.
그렇다면 클래식 음악을 근본적인 관점에서, 즉 극을 위한 양식이 아닌 양식에 의해 구현되는 ‘극’의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또 다른 청취 가능성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관점에서 여러 글을 쓰면서 감상의 지평을 넓히고자 하고 있지만, 사실 무엇보다도 무대에서의 구현이 중요하다. 이것이 피아니스트 정다슬과 연극배우 지현준, 김윤신 작가, 그리고 기획자이자 작곡가인 배승혜가 함께한 ‘DIALOGUES × PUNTO BLU’(다이얼로그 × 뿐또 블루) 시리즈의 두 번째 공연 ‘베토벤: 발트슈타인-반복’(6월 21일 뿐또블루)이 눈에 띈 이유이다. 이 공연은 음악의 형식과 표현에 담긴 극적인 요소를 언어와 병치함으로써 베토벤의 ‘발트슈타인 소나타’를 극으로서 감상하도록 했다.
무대에는 피아니스트와 ‘작곡가’의 역할을 맡은 배우가 있다. 작곡가가 바흐의 ‘골트베르크 변주곡’ 중 ‘아리아’를 연주한다. 그리고 선율이 흐르는 바흐의 이 음악과 달리 베토벤은 화음으로 진행한다고 말하며 자연스레 ‘발트슈타인 소나타’로 화제를 옮긴다. 이윽고 피아니스트는 작곡가의 대본에 맞춰 연주를 시작한다. 작곡가는 이 작품의 음악적 특징을 상당히 자세히 설명하면서도, 주제에 담겨있는 감성, 다이내믹으로 분출하는 열정, 그리고 이들이 반복되고 변형되는 과정에 새겨진 베토벤의, 혹은 작곡가 자신의 삶을 이야기한다. 만약 작곡가가 강의하듯이 이야기했다면 해설음악회가 되었을 테지만, 그는 주체가 되어 음악을 이끌기도 하고 또한 감상자로서 연주에 심취하기도 하며, 피아니스트는 작곡가의 이야기에 맞춰 연주하며 작곡가가 되기도 하고 또한 베토벤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그 둘은 대화하며 하나가 된다. 그리고 이 대화에 공감하는 순간, 200년 전 베토벤의 소나타에서 내 삶의 이야기가 들려온다.
| 공연 ‘베토벤: 발트슈타인-반복’의 피아니스트 정다슬. (사진=정다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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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 공연은 음악이 있는 연극, 즉 일반적인 음악극이 아니다. 음악을 극으로 이해하게 하고, 또한 연극을 음악적으로 듣게 하는, 이중적이고 교차적인 상호텍스트성의 경험을 주는 작품이다. 악보에 적힌 지시를 재현하는 클래식 음악 연주의 편견을 깨고 음악적 표현의 의미를 극의 평면으로 온전히 투영함으로써 음악은 극이 되었으며, 연극은 음악의 흐름에 온전히 맞춤으로써 음악이 되었다.
물론 이 공연이 시도한 음악의 극적 청취는 감상자의 대중화된 취향을 목표로 한 것은 아니다. 분명 콘텐츠에 접근하는 오늘날의 감각과 연결점이 있으며, 이러한 청취 경험의 확장으로 클래식 음악은 우리 시대에 또 하나의 삶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