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 지옥 여행·냉전 우주 경쟁…닮은 두 서사 담았죠"

태미 응우옌 국내 첫 개인전
'신곡'의 지옥편·우주선 이미지 결합
"작품보며 패러다임의 전환 등 생각해보길"
5월 6일까지 리만머핀 서울 갤러리
  • 등록 2023-03-28 오전 5:30:00

    수정 2023-03-28 오전 5:30:00

[이데일리 이윤정 기자] 지옥의 아홉 개 고리를 통과하는 단테와 베르길리우스. 그들의 영적 순례길에 우주선이 함께 놓여 있다. 배경은 따뜻한 주홍빛과 분홍빛이다. 두 인물이 지옥을 통과하는 여정을 마치고 새로운 여명으로 향하는 것을 의미한다. 상상력을 좀 더 발휘해보자면 두 사람이 우주 탐사를 완수하고 태양의 열기와 빛을 향해 나아가는 것일 수도 있다.(태미 응우옌의 ‘My Guide and I’)

얼핏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우주 경쟁’과 ‘단테의 영적 여행’은 천상계 우주 가장 먼 곳에 도달하려는 열망을 담았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베트남계 미국작가 태미 응우옌이 두 이미지의 결합을 시도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작가는 두 이미지의 유사성에 주목하며 이를 다채로운 색감의 회화로 표현했다. 오는 5월 6일까지 서울 용산구 리만머핀 서울 갤러리에서 열리는 태미 응우옌의 개인전 ‘필멸의 존재를 위한 희극: 지옥편’에서는 그의 작품 20여점을 만나볼 수 있다.

태미 응우옌(사진=리만머핀 서울).
이번 전시는 단테의 ‘신곡’에서 영감을 얻었다. 신곡은 단테가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안내로 지옥과 연옥을 거쳐 연인 베아트리체가 먼저 가 있는 천국에 다다르는 여정을 그린 3부작 대서사시다. 한국 전시는 그중 1부 ‘지옥으로의 여정’을 다룬다. 2024년 리만머핀 런던에서 ‘필멸의 존재를 위한 희극: 연옥편’과 2025년 리만머핀 뉴욕에서의 ‘필멸의 존재를 위한 희극: 천국편’을 순차적으로 선보일 예정이다.

최근 리만머핀 서울에서 만난 태미 응우옌은 “특정 사회에서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관심을 가져왔다”며 “오늘날 서구 세계관을 형성한 두 역사적 서사의 공간적·문학적 유사성을 담으려 했다”고 설명했다.

응우옌은 동남아시아와 디아스포라(본토를 떠나 타국에서 살아가는 공동체 집단)에 천착해온 작가다. 코네티컷 주 이스턴을 기반으로 삼아 활동하면서 미국·유럽·일본·베트남·싱가포르 등에서 다수의 개인전과 단체전을 열었다. 이번 서울 전시는 2022년 리만머핀 전속 작가로 합류해 여는 첫 전시다.

태미 응우옌의 ‘Leading the Way’(사진=리만머핀 서울).
전시는 천천히 들여다볼수록 재미가 있다. 가령 ‘리딩 더 웨이’(Leading the Way)에서 화면 전체를 차지하는 베르길리우스의 형상은 선명한 나뭇잎 패턴으로 뒤덮여있다. 자세히 보면 ‘지옥편’에 등장하는 인간의 머리와 전갈의 꼬리를 가진 뱀 모양 괴물이 복잡하게 엉켜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캔버스 표면에는 작고 빛나는 금속박이 미사일과 로켓 모양으로 도장처럼 압인(스탬핑)되어 있다. 멀리서 바라보면 캔버스를 덮은 별이나 빗방울처럼 보인다.

작가는 허구와 역사를 교차시키며 문학, 냉전, 식민주의, 폭력, 환경 등 다양한 주제를 탐구한다. 단테와 베르길리우스가 지옥으로 하강하는 영적 순례와 냉전 시대 미국·소련 간의 우주 경쟁을 한 캔버스에 담았다. 미국의 우주 진출에 앞장섰던 린든 B. 존슨 부통령, 존 F. 케네디 미 대통령 등 역사적 인물들도 등장한다. 냉전 시기에 발행된 신문인 ‘스타스 앤 스트라이프’지 헤드라인도 차용했다.

“작품에 1984 등의 숫자를 도장처럼 찍어놓기도 했어요. 1차 냉전이 종식된 해를 뜻하죠. 이러한 요소들을 통해 패러다임의 전환 등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자 했어요. 제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어떤 의미인지 함께 고민해봤으면 하는 마음을 담았죠.”

2층 공간에는 아티스트북 6권을 전시해놓았다. 신곡 지옥편 원문 구절을 삭제하거나 변경하는 식으로 작가만의 시를 보여준다. 우주선 모양 등으로 만들어 펼쳐보는 재미도 느껴볼 수 있다. 응우옌은 “작품들을 통해 단테의 시와 냉전 시대 주요 갈등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다”며 “역사적 사실과 여러 언어들 사이를 오가며 다양한 상상을 해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태미 응우옌의 ‘And I Following’(사진=리만머핀 서울).
태미 응우옌 개인전 전시전경(사진=리만머핀 서울).
태미 응우옌 개인전 전시전경(사진=리만머핀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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