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탄하다가 바로 옆에 늘어서 있는 퇴계 이황(1501~1570) 선생의 시비들로 눈길이 향한다. 경관도 빼어난데 역사적 인물의 자취도 만날 수 있으니 금상첨화다. 퇴계는 도산에서 청량산으로 이어지는 이 강변길을 오가며 아름다운 자연과 자신의 소회를 시로 담아냈다. 옛 성현이 가던 길이라는 뜻인 ‘녀던 길’이란 이 길 명칭도 퇴계의 「도산십이곡」 제9곡 가사 중에서 따온 것이다.
이곳 산천에 대한 퇴계의 감회는 그 깊이와 폭이 일반인과는 사뭇 달랐다. 457년 전 어느 날 새벽 해 뜰 무렵 광경을 담아낸 시가 바로 그렇다. 그날 새벽 여기서 만나 청량산을 가기로 약속한 죽마고우 벽오 이문량 (1498~1581)이 웬일인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자 시시각각 밝아오는 풍광 앞에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던 퇴계는 ‘나 먼저 말 타고 그림 속으로 들어가네’라고 한 폭의 수채화 같은 시를 읊으며 먼저 출발했다. 그리고는 이어지는 강변으로 나아간 그는 ‘맑은 여울과 높은 산 숨었다 다시 나타나니/ 한없이 변하는 모습 나의 시상을 돋우네’라며, 태극처럼 굽이도는 산과 강의 모습을 마치 사진을 찍듯 놓치지 않고 시로 담아냈다. 그러면서 자신이 자연을 이렇게 좋아하니 ‘눈에 가득한 산봉우리들도 나를 반갑게 반기네’라며 노래하였다.
자연으로 돌아온 퇴계는 이곳에서 사색하며 많이 배우려고 하였다. 성리학자답게 퇴계는 인간은 자연이 부여한 본성대로 바르게 살아가야 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자연은 언제나 변하지 않는 하늘의 이치[天理]에 따라 운행하는데 인간은 본성대로 살아가지 못하고 사욕에 이끌리기 쉬운 존재가 아닌가? 그러니 하늘이 내린 착한 본성을 보전하고 사욕을 막는최고의 공부 장소는 자연이 아닐 수 없다.
강물 속에 우뚝 솟아 있는 경암(景巖)이란 바위를 읊은 시에서도 그런 의지가 읽힌다. “천 년 동안 물결친들 어찌 닳아 없어지겠는가/ 물결 속에 우뚝 솟아 그 기세 씩씩함을 다투는 듯/ 인간의 자취란 물에 뜬 부평초 줄기 같으니/ 뉘라서 이 가운데 굳게 서서 견디리오”
녀던 길은 그저 그런 사람들이 지나다닌 길이 아니라 퇴계가 오가며 그의 정신세계를 남긴 길이다. 그 결과 이곳의 자연 또한 퇴계를 만나 더욱 가치 있는 명소가 되었다. 녀던 길이 조선시대에는 퇴계를 흠모하는 선비들의 발길이 마치 성지를 순례하듯 끊임없이 이어지던 길이었다는 사실이 이를 잘 말해준다. 오늘의 우리도 녀던 길을 걸으며 빼어난 자연을 감상할 뿐 아니라 퇴계선생이 남긴 사람답게 사는 길에 대한 공부를 할 수 있으니 큰 횡재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