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워-스트래티지(WarStrategy)
전쟁은 무기의 질, 병력의 수보다 어떻게 준비하고 어떤 전략과 작전을 바탕으로 전투를 수행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된다. 한국전쟁을 시작으로 페르시아 전쟁 등 인류사의 향배를 결정지은 수많은 전쟁과 이에 얽힌 전략적 사유를 통해 개인과 국가의 행위를 이해하는 폭을 넓힌다.
☆ 최영진 중앙대 정치국제학과 교수
중앙대에서 정치국제학과 교수로 재직.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 육군, 지작사, 특전사 발전자문위원. ‘전쟁과 미술’ 발간. ‘현대군사명저를 찾아’, ‘군사고전 다시읽기’, ‘역사속의 군사전략’ 등 기고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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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혹에 상인에서 선교자로 대변신…무함마드의 생애
무함마드는 570년 메카(쿠라이시 부족)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차례로 부모를 여의고 고아가 된 무함마드는 할아버지와 삼촌 손에서 자랐다. 장성하면서 카라반(무역상)에 합류한 무함마드는 자신의 진가를 알아봐 준 상단의 여주인과 결혼해 비교적 순탄한 삶을 살았다. 우리로 치면 불혹(40세)을 넘긴 610년 무함마드는 은둔과 명상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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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메디나는 보복이 또 다른 보복을 불러오는 등 부족 간 불화와 갈등이 끊이질 않았다. 여기에서 무함마드는 중재자로서 권위를 인정받으면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데 성공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함무라비 법전식(式) 대응이 아니라 살인 등 범죄에 대해 위자료를 물리는 방식으로 상인 특유의 현실감각을 발휘했다. 피비린내나는 복수의 시대는 그렇게 무함마드에 의해 저물었다.
무함마드의 기념비적 첫 전투…3배 이상 전력 차이 극복한 전략가
그럼에도 이주 직후 무함마드 세력은 보잘것없었다. 무엇보다 경제적으로 취약했다. 무함마드의 첫 번째 군사활동은 메카와 메디나를 오가는 카라반을 습격하는 것이었다. 무함마드와 이슬람에도 나름의 이유는 있었다. 이들은 메카에 놓고 와 빼앗긴 재산을 되돌려받는다는 명분으로 카라반을 공격했다.
처음에는 10명 내외의 소규모로 부대를 구성했으나 점점 규모가 커지더니 급기야는 메카의 최대 상단 중 하나였던 아부 수피얀의 카라반을 약탈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아부 수피얀의 카라반은 시리아에서 물건을 사서 메카로 되돌아오는 길이었다. 메디나에 첩자를 보내 무함마드의 계획을 알게 된 아부 수피얀은 메카에 협조를 요청했다. 메카에서 무함마드를 막기 위한 쿠라이시 부대가 메디나로 북진했다. 624년 양측 군대는 바드르에서 만나 전투를 벌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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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교수는 “무함마드 군대는 종교적 사명감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명령에 의해 움직이는 쿠라이시 군보다 강력했다”고 말했다. 제대로 된 전투에서 무함마드 군이 처음으로 거둔 승리였다. 메디나 공동체의 지도자로서 무함마드의 권위를 다시금 공고히 한 기념비적인 전투이기도 했다.
최 교수는 “포로 처리 문제 역시 쟁점이었는데, 관행에 따라 처형하지 않고 무함마드는 몸값을 받고 풀어주며 자신의 관대함을 과시했다”면서 “(동시에) 전투의 발단이었던 경제적 어려움도 해소했다. 무함마드는 이를 이슬람 세력의 전력을 강화하는 기반을 닦는 데 썼다”고 말했다.
정치-종교 길항관계에도 균형 감각 발휘한 전무후무 지도자
무함마드가 명성을 드높이면서 이슬람에 귀의하는 이들도 조금씩 늘어났다. 반대로 그를 경계하고 적대시하는 이들도 많아졌다. 그로부터 1년 후 메카에서 더 많은 쿠라이시 군이 메디나를 공격해온다. 전력 차 역시 더 벌어졌다. 메디나 북서쪽 우후드 산기슭에 진을 친 무함마드는 길목 한가운데 언덕에 궁수를 배치해놓았다.
쿠라이시 부족을 중심으로 유대인, 베두인 등이 연합한 1만명이 626년 또다시 메디나를 공격했다. 이에 맞선 메디나 방어군은 6000명가량이었다. 메카 연합군이 진군하는 6일간 무함마드 군은 참호전을 준비했다. 참호 밖에는 곡식 한 톨 남기지 않고 없애버리는 청야 전술로 장기전을 대비했다. 12월 아라비아 반도의 밤은 춥고 혹독한 비바람이 몰아쳤다. 최 교수는 “무함마드는 연합군의 중요한 병력인 베두인 가타판을 회유하는 한편 적군에 붙은 바누 쿠라이자 부족을 적절히 견제해 27일간 이어진 칸다크 전투는 결국 무함마드군의 승리로 끝이 났다”고 말했다.
무함마드 군은 자신들을 배반한 쿠라이자 부족의 남자는 처형하고 여자는 노예로 팔아치운다. 최 교수는 “포로에 관대했던 무함마드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 집단학살”이라며 “배신이 반복되지 않게끔 하는 경고하면서 자신의 위용과 권능을 강조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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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0년 무함마드는 스스로 메카를 떠난 지 8년 만에 1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메카로 진군했다. 소소한 전투는 있었지만 사실상 거의 피를 흘리지 않고 무함마드의 군대는 메카에 무혈 입성했다. 아부 수피얀은 무함마드에 항복하고 이슬람으로 개종을 약속했다. 무함마드 역시 정적인 그에게 축복을 내리고 그의 지위를 인정해줬다. 이로써 무함마드는 메카-메디나 등 아라비아 동부 지역을 거느리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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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함마드는 승리를 위해 외부와 손잡는 데에도 거리낌이 없었다. 베두인 기병부대는 무함마드 군과 함께했으며 비 무슬림교도도 마찬가지였다. 최 교수는 “대단한 실용주의적 정신”이라며 “종교의 확산을 위한 전쟁이지만 (이에 얽매여) 전술적 유연성을 잃지 않은 것”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그러면서 “무함마드는 다른 종교 지도자는 물론 정치 지도자와도 비교할 수 없다. 인류 역사에서 종교적 삶과 정치적 제도를 결합해 성취를 이룬 전략가는 무함마드가 유일무이하다”고 총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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