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자 된장녀 소동
이번 행사에서는 UCC(사용자제작콘텐츠)동영상을 활용한 광고 기법들이 여러 건 소개됐다. UCC동영상이 처음 등장했을 때는 광고 산업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논란이 있었다. 훨씬 낮은 비용으로 기발한 영상을 쏟아내는 네티즌들이, 광고 생산을 독점하는 대행사의 영향력을 떨어뜨릴 것이란 예상이었다.
그러나 이번 행사에서 UCC동영상은 광고 산업에 활력을 불어넣을 대표적인 매체로 부각됐다. 대표적인 예는 작년 말 미국 동영상 사이트인 유튜브(YouTube)에서 일어난 ‘부자 된장녀(spoiled rich girl)’ 소동.
도미노 피자 홍보용으로 만들어진 1분40초짜리 짤막한 동영상은 ‘맥킨지(Mackenzie)’라는 이름의 10대 소녀가 겪은 일상을 담고 있다. 맥킨지의 생일을 맞아 가족들은 빨간색 사브 컨버터블 승용차를 깜짝 선물로 준비하지만, 정작 선물을 받은 맥킨지는 “왜 파란색을 사지 않았느냐”며 가족들에게 마구 화를 낸다. 앵글의 흔들림과 등장인물의 행동이 극히 자연스러웠고, 네티즌들도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촬영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인터넷에서는 ‘된장녀 논란’이 일었고, 동영상은 급속히 퍼져 나갔다. 흥분한 네티즌들은 댓글을 통해 맥킨지를 욕하는 데 열을 올렸다. 맥킨지는 두 번째 동영상에 등장해 “나는 부자 된장녀가 아니다”고 해명하기도 했다. 이어진 동영상들을 통해 사람들은 맥킨지가 꿈에 그리던 파란색 자동차를 선물로 받았다는 사실과, 처음 받았던 빨간색 스포츠카를 9.99달러에 처분하려 한다는 걸 알게 됐다. 사람들의 관심은 더욱 커져갔다. 수백만 명이 클릭한 마지막 UCC동영상은 결국 도미노 피자 광고 홈페이지로 연결됐다.
도미노 피자 광고는 입소문을 통한 마케팅 기법에 UCC동영상이라는 높은 확장성을 가진 매체를 결합해 광고 효과를 극대화한 것이다. 다국적 광고 대행사 레오 버넷(Leo Burnett) 아태지역 대표인 미셸 크리스툴라 그린(Kristula-Green)은 “유튜브, 마이스페이스, 세컨드 라이프에 이르기까지 인터넷이 제공하는 가상 세계의 사회적 네트워크는 광고제작자들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제공하고 있다”고 말했다.
■ 가상세계와 현실의 벽을 허물다
홍보를 맡은 다국적 광고대행사 TBWA가 내놓은 프로젝트는 인터넷 공간을 무대로 하는 픽션(허구)광고. 신화 속 거인을 소재로 한 게임 원작에 맞추어 지구상에 거인이 존재한다는 허구적 현실을 그렸다.
2005년 10월 TBWA는 ‘거인학(giantology)’이라는 이름이 붙은 한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기괴한 이야기를 전파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인도 남부의 항구도시 첸나이 해변을 포함한 전세계 5곳에서 신화 속 거인의 유해가 발견됐다는 뉴스 동영상과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들이 올라 있었다. 홈페이지는 신비롭고 기괴한 내용으로 네티즌들의 호기심을 자아내며 몇 달 만에 100만 명이 넘는 방문자 수를 기록했다.
이 광고를 더욱 큰 성공으로 이끈 건 네티즌들의 자발적인 참여였다. 광고의 설정에 매료된 네티즌들은 거인의 존재를 증명하는 사진과 동영상, 자료를 만들어 인터넷에 뿌리기 시작했다. 홈페이지, 블로그, 비디오, 포드캐스트 등을 통해 ‘거인학’이라는 장르가 인터넷 공간에 급속히 퍼져 나갔다. 마니아들은 오프라인 상에서 모임을 갖고 실제 거인을 찾아나서는 탐험대를 결성하기도 했다.
하나의 홈페이지가 이룬 성과는 놀라웠다. 전세계 110개 국에서 35만명이 방문했고, 동영상은 2300만명의 재생 횟수를 기록했다. 게임이 공전의 히트를 쳤음은 물론이다. 당시 광고를 기획한 TBWA의 장 마리 드루 회장은 “인터넷으로 가상세계와 현실세계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창의성의 시대가 열렸다”며 “두 세계가 합쳐져 만들어 내는 쌍방향(interactive) 세상에서 창의성은 한계가 없다”고 말했다.
인터넷의 쌍방향성을 이용해 소비자에게 ‘가상 쇼핑’의 즐거움을 제공하는 광고도 있다. 이탈리아 자동차 메이커 피아트(Fiat)는 신 모델을 출시하며 인터넷 홈페이지에 엔진부터 휠까지 모든 옵션을 가상으로 장착해 볼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자동차를 사려고 마음 먹은 사람은 홈페이지에 들어와 클릭 몇 번으로 자기 취향에 꼭 맞는 모델을 화면에 만들어 볼 수 있다. 옵션에 따른 가격도 자동으로 계산된다. 수동적 광고 수용자에 머물렀던 소비자에게 선택의 재미를 부여함으로써 관심을 이끌어낸 것이다.
■ 광고, 광고를 고발하다
광고대행사 오길비앤매더(O&M)가 유니레버(Unilever)의 도브(Dove) 제품을 광고한 이 작품에는 한 여성이 화장기 없는 얼굴로 등장한다. 이어 화장을 하고 머리를 다듬고 포토샵 처리를 하는 모든 과정의 장면이 빠른 속도로 보여진다. 결국 아름답게 ‘진화’한 여성의 얼굴은 마지막 순간에 화장품 옥외 광고임이 드러난다. 광고는 다음과 같은 자막으로 끝을 맺는다. “아름다움에 대한 우리의 감각이 뒤틀리고 왜곡된 건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이 광고는 미용 관련 회사가 스스로 자사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던 종류의 광고였다. 프랑세즈 실로(Chilot) 유럽상업영화제작자협회장은 “최근 광고들은 사회적 이슈들뿐 아니라, 업계와 관련된 부정적인 주제까지 활용할 정도로 적극적”이라고 말했다.
광고는 메시지 전달자의 역할에서 사회 문제에 참여하고 이슈를 선도하는 역할까지 맡고 있다. 2005년 가수 이효리와 북한배우 조명애의 만남을 그린 한 삼성의 ‘애니콜(Anycall)’ 광고가 그 예다. 남북의 여자 톱스타가 만난 이벤트는 짧은 기간 동안 큰 관심을 끌어 모았다.
광고가 방영된 직후 이뤄진 설문조사에서 10명 중 4명이 애니콜 광고를 알고 있고, 이벤트를 긍정적으로 생각한다고 답했다고 제일기획은 밝혔다. 강연에서 애니콜 광고 사례를 소개한 조 맥도나우(McDonagh) 제일기획 월드와이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이전까지 종교나 정치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피하려고 했던 주제였다”며 “그러나 이제 광고는 설교나 투쟁 없이도 정치적인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 10년 후에 다시 보는 광고
행사 참석자들은 인터넷 시대 광고 산업의 미래에 대해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TBWA 장 마리 드루 회장은 “인터넷 세계는 많은 기회를 제공하지만, 멀티미디어 등 기법에만 치중하기보다 창의성의 본질을 지키려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연설 말미에 10년 전 애플 광고를 소개했다. 그는 “애플 광고는 혁신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다”며 “좋은 광고는 10년 후 최신 기술이라는 껍데기를 벗어버린 후에도 여전히 즐거움을 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