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이번 삼성 위기론의 실체는 무엇일까. 이데일리는 최근 황영기 초록우산어린이재단 회장(전 삼성증권 대표이사), 이근면 전 인사혁신처장(전 삼성광통신 대표이사), 양향자 전 국회의원(전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 플래시개발실 상무), 이종환 상명대 시스템반도체공학부 교수(전 삼성전자·삼성디스플레이 수석연구원)과 익명을 원한 전직 삼성 임원들을 인터뷰했다.
고용 경직성에 발목 잡힌 삼성
사회 전반에 퍼진 이른바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 문화에서 삼성 역시 자유롭지 않았다는 지적이 첫손에 꼽혔다. 여기에 주 52시간 근무제를 법으로 강제한 게 쐐기를 박았다. 양향자 전 의원은 “TSMC, 엔비디아 등의 엔지니어들을 보면 ‘일주일에 몇 시간 일하겠다’는 식이 없다. 오로지 성과를 중심으로 한다”며 “글로벌 기술 전쟁터에서 살아남으려면 지금 같은 문화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저만 해도 ‘우리는 기술로 세계를 제패한다’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고 직장 생활을 한다는 의미를 완전히 초월해 있었다”며 “몇 시간을 일했는지는 의미가 없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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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재벌’ 시각으로 보는 정서도 여전하다. 이근면 전 처장은 “삼성전자의 주주가 수백만명인데, 이제는 삼성가(家) 기업이 아니라 국민 기업으로 보는 게 맞는다”며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재벌을 보는 눈으로 보고 발목잡기를 한다”고 했다. 삼성에 대한 우리 사회의 요구가 너무 과도한 것은 아닌지, 삼성이 국가에 기여하는 걸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는 의미로 읽힌다. 그는 “대만 TSMC를 보라”며 “국가적으로 사활을 걸고 지원하는데, 우리는 그렇게 하고 있는지 반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전직 삼성전자 부사장급 인사는 “이재용 회장이 사법 리스크에 발목 잡혀 있는 게 과도하다고 본다”며 “이러면 이 회장뿐만 아니라 모든 임원들이 방어적으로 바뀔 수밖에 없다는 게 근본적인 문제”라고 했다.
이외에 공학·기술 인재에 대한 처우 악화를 거론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삼성전자 전 임원은 “삼성 반도체는 이제 ‘패스트팔로워’가 아니라 ‘퍼스트무버’가 돼야 하는 시점인데, 정작 고급 인재 확보는 과거보다 더 어려워졌다”며 “의대를 가야 성공한 인생이라는 생각이 우리 사회에 만연한 것 같아 우려스럽다”고 했다. 그나마 삼성을 다녔던 기술 인력들마저 이제 미국 등으로 떠나는 경향이 짙어졌다는 게 이 인사의 설명이다.
이와 함께 △점점 더 커지는 노조 파업 리스크 △정부의 첨단산업 지원 미비 등을 언급하는 인사들도 많았다. 양향자 전 의원은 “(이번 삼성 위기론은) 사실은 대한민국의 위기라고 본다”고 했다. 이근면 전 처장은 “사회 전반에 삼성이 부화뇌동 하면 안 된다”며 “그렇기 때문에 이번을 계기로 삼성만의 새로운 기풍이 필요하다”고 했다.
“삼성전자 너무 많은 사업” 지적도
이는 삼성 내부의 임직원에 대한 권한 위임이 과거보다 약해졌다는 관측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많은 권한을 위임하고 실수를 용인해야 신명나게 일하고, 이를 통해 창의성이 나온다는 것은 경영의 기본이다. 그럼에도 삼성 내부적으로는 눈치보기 보신주의가 점차 강해지는 기류다. 재계에서는 그 시점을 삼성을 뒤흔든 2017년 국정농단 사태로 보는 시각이 강하다. 이근면 전 처장은 “지금 의사결정이 늦어지는 것은 신중함 때문이 아니라고 본다”고 말했다.
이같은 흐름이 이어지면서 정작 글로벌화는 더뎌졌다는 게 다수의 분석이다. 황영기 회장은 “삼성은 연못 속의 고래가 돼 버렸다. 시장이 글로벌하다고 해서 의식이 글로벌해지는 것은 아니다”며 “조직과 인력의 상당 부분을 해외로 옮겨서 세상의 변화를 직접 체험하면서 대응해 나가야 한다”고 제언했다.
일부에서는 삼성전자가 너무 많은 사업을 한 회사 안에서 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삼성전자는 메모리, 파운드리, 시스템LSI 등 굵직한 반도체 사업을 모두 하고 있고, 그외에 스마트폰, TV, 생활가전, 네트워크 장비 같은 세트 사업까지 하고 있다. 삼성전자의 한 전직 임원은 “각 사업의 근본 경쟁력을 다시 점검해야 한다”며 “많은 사업을 한 회사에서 하는데 대한 득실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