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 고갈에 사재기까지…러시아판 '고난의 행군'

극단적인 금융 통제 조치 나선 푸틴
효과 미지수…"러 경제 조급증 반영"
휴지조각 된 러 루블화…사재기 만연
푸틴 야심에 애꿎은 국민들만 '타격'
  • 등록 2022-03-01 오전 8:12:23

    수정 2022-03-01 오후 8:36:15

[뉴욕=이데일리 김정남 특파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서방에 맞서 초강력 금융 통제 조치를 내렸다. 국외 외화 송금을 금지하고 무역업자에 외화 수입을 강제 매각하도록 하는, 말 그대로 극단적이고 이례적인 조치다.

이는 서방의 잇단 제재로 러시아에 달러화가 말라버린 탓에 나온 대책인데, 역설적으로 러시아 경제가 얼마나 어려운지 방증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무작정 송금을 막는다고 해서 루블화 대신 달러화를 모으려는 심리가 사라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루블화 폭락에 따른 하이퍼 인플레이션은 당분간 불가피하다는 진단이다. 푸틴 대통령의 옛 소련 재건 야심에 러시아 국민들만 ‘고난의 행군’을 맞은 셈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사진=AFP 제공)


◇극단적인 금융 통제 나선 푸틴


지난달 28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은 이날 서방의 금융 제재에 맞서 특별 경제조치 대통령령을 발령했다고 크렘린궁은 전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당장 3월 1일부터 러시아 거주자들에게 국외 외화 대출과 송금을 금지하라고 푸틴 대통령이 지시한 점이다. 해외 은행에 개설된 자기 계좌로 외화를 송금하거나 계좌 개설 없이 전자결제를 이용해 돈을 나라 밖으로 보내지 못하도록 한 조치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 진영의 대러 금융 고립 정책으로 러시아 내에 외화, 특히 달러화가 순식간에 동이 날 위기에 처하자, 송금 자체를 아예 차단한 것이다.

실제 근래 러시아 곳곳의 자동화기기(ATM) 근처에 달러화를 인출하려는 인파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루블화 가치가 폭락하면서 환율이 치솟고 있음에도 어떻게든 달러화를 모아두려는 현상이 만연해 있다고 한다.

푸틴 대통령은 더 나아가 나라 밖에서 무역을 하는 업자들은 올해 1월부터 해외에서 확보한 외화 수입의 80%를 매각해야 한다고 명령했다. 이는 사흘 내에 해야 한다는 내용이 대통령령에 포함됐다. 강제로 달러화를 내놓으라는 의미다.

이같은 조치는 민간 경제 활동의 자유를 극단적으로 제한하는 조치라는 점에서 매우 이례적이다. 미국이 러시아 중앙은행과 국부펀드 등과 거래를 전면 차단하자, 러시아 역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대처하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미국 재무부 해외자산통제실(OFAC)은 이날 성명을 통해 대러 추가 금융 제재를 발표하면서 “러시아 중앙은행이 미국에 갖고 있는 모든 자산을 동결한다”고 했다.

러시아 외환보유액은 6310억달러(약 752조원) 규모다. 세계 4위다. 그런데 이 중 3분의 2에 해당하는 수준인 4000억달러는 미국 뉴욕, 영국 런던, 독일 베를린, 프랑스 파리, 일본 도쿄 등 해외 금융기관에 보관돼 있다고 뉴욕타임스(NYT)는 전했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하루아침에 수천억달러가 사라진 셈이다. 스탠퍼드대 후버연구소의 마이클 번스탬 연구원에 따르면 러시아가 실제 보유한 외화는 120억달러에 그치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날 푸틴 대통령의 초강력 조치는 러시아 정부가 얼마나 조급한지 암시한다는 해석이 가능한 대목이다.

휴지조각 된 루블화…사재기 만연

러시아 경제는 사태가 장기화할수록 악화할 가능성이 높다. 러시아 채권 디폴트(채무불이행) 위험 폭증→러시아 채권 가치 폭락→루블화 가치 추가 폭락→러시아 내 달러화 고갈→환율 폭등에 따른 물가 대란 등의 수순이 불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이미 국제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러시아의 국가신용등급을 정크 수준인 BB+로 강등했다. 다른 신평사들 역시 도미노 강등에 나설 게 유력하다.

러시아 중앙은행이 환율 방어를 위해 아무리 기준금리를 올린다고 해도 손 쓰기 어려운 지경에 치달을 수 있다. 실제 러시아 중앙은행은 기준금리를 9.5%에서 20.0%까지 인상했지만 시장 혼란은 이어지고 있다. 러시아는 이날 증시를 열지도 못했다.

모스크바에 위치한 한 컨설팅업체를 운영하는 크리스 위퍼는 BBC에 “루블화 가치 폭락으로 싱품 가격 상승이 예상되면서 일부 식료품점에서는 사재기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며 “서방의 제재는 (일상을 사는 보통의) 러시아인들에게 타격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자 내부의 경제 대란 상황을 뒤집고자 러시아군이 더 잔혹하게 우크라이나를 공격할 수 있다는 관측이 일부에서 나온다. 푸틴 대통령이 핵 카드를 공개적으로 거론하는 게 그 방증이다.

다만 변수는 있다. 중국이 전략적으로 러시아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줄 경우다. 서방 진영에 반대한다는 공통의 이해관계를 고리로 러시아 경제에 조금이나마 숨통을 트여줄 수 있다는 분석이 없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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