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베이징=이데일리 안승찬 김대웅 특파원, 김정남 기자] “뭔가 벽에 딱 부딪히는 느낌이더라고요.”
한국은행의 전직 고위임원 출신 A씨는 지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경제 흐름만 생각하면 머리가 아프다. 그는 금융위기가 불거졌을 당시만 해도 경기 사이클에 따라 세계 경제든, 우리 경제든 자연스럽게 살아날 것으로 봤다고 한다. 그런데 한해 한해 지날수록 점점 자신이 없어지더라는 거다.
A씨는 “한은에 있을 때는 그런 얘기를 못했지만 정책에 따라 경제가 움직이지 않으니 참 답답했다”면서 “(교과서에 나오는) 경기 사이클이 이제는 의미가 없어진 것 같다”고 토로했다.
그 즈음부터 선진국을 중심으로 ‘극약처방’이 나왔다. 이른바 양적완화(QE) 등 비전통적 통화정책이다. 중앙은행은 통화정책을 통해 단기금리를 직접 움직이고, 단기금리를 통해 장기금리에 간접 영향을 준다. 이게 교과서적이다. 하지만 전통적 방식의 부양책을 쓰면서 정책금리가 제로(0)가 되면 어떨까. 중앙은행의 역할은 끝난 것일까. 미국 영국 유럽 일본 등은 그 금기를 깼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는 2008년 12월 정책금리를 제로(0.00~0.25%)로 낮춘 뒤, 장기금리를 직접 더 내리고자 장기국채와 주택저당증권(MBS) 등을 샀다. 연준이 자산을 매입하면서 그만큼 시중에 돈이 풀렸고 장기금리는 하락했다. 경기를 살리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천명한 것이다. 그렇게 연준은 2014년 10월까지 세 차례 걸쳐 양적완화 프로그램을 시행했다. 사들인 자산이 무려 4조달러다.
유럽중앙은행(ECB) 영란은행(BOE) 일본은행(BOJ)의 양적완화는 현재진행형이다. 이들 중앙은행은 아직도 국채와 회사채 등을 매입하고 있다.
“양적완화의 고민은 경기를 살리지 못한다는 것”
이런 ‘금융 실험’ 결과, 장기금리를 떨어뜨리는 것까지는 성공했다. 현재 미국 국채 10년물 금리는 1.7%대다. 2년 전(2.3%대)과 비교해도 한참 떨어졌다. 일본 국채 10년물 금리는 심지어 마이너스(-)다.
장기금리가 떨어졌음에도 경제심리는 회복되지 않고 있다. 일단 경제성장률이 반등하지 않고 있다. 영국은 2009년 3월 자산매입기금(APF)을 설치해 국채와 회사채 등을 매입하고 있다. 지난달부터는 100억파운드 규모의 회사채매입 프로그램(CBPS)도 새로 도입했다. 다만 2010년 당시 분기별로 전기 대비 0.5%→1.0%→0.6%→0.1%의 성장률을 기록했는데, 이후 나아지는 기미는 없다. 올해 1분기와 2분기 성장률은 각각 0.4%, 0.7%다. 미국 독일 일본 등의 상황도 비슷하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박사는 “비전통적 통화정책의 가장 큰 고민은 경기 측면에서 나아지는 게 없다는 점”이라면서 “이는 응급처치 수단이지 근본적인 대책은 아니다”고 말했다. 한은 고위임원 출신 A씨의 고민도 이와 그 맥락이 같다.
문홍철 동부증권 연구원은 최근 테레사 메이 영국 총리의 발언을 주목하고 있다. 메이 총리는 “중앙은행 통화완화책이 불평등을 야기시키고 있다”면서 “바꿀 필요가 있다”고 했다. 마크 카니 BOE 총재도 이 언급에 “동의한다”고 했다. 민심에 민감한 정치인들이 먼저 양적완화 무용론을 감지했다는 게 문 연구원의 설명이다. 그는 “BOE의 양적완화가 더는 불가능할 것”이라면서 “다른 국가들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각국 중앙은행들이 8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양적완화로 “더이상 살 채권이 없다”는 기술적 한계도 거론되긴 한다. 다만 더 근본적인 건 “변한 게 없더라”는 점이다. 실질 부가가치 생산량이 높아지면서 더 많은 물건을 만들어내고 덩달아 실질 소득과 실질 구매력이 올라가는 식의 경제성장 선순환 구조에서, 비전통적 통화정책은 힘을 못 쓴 것이다.
금융권 고위인사는 “화폐량 증가가 생산량 증가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면서 “심지어 중앙은행 역할은 본원통화량을 늘리는 것이고 실제 대출로 유동성을 만들어내는 건 시중은행인데, 그 경로도 약해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넘쳐나는 돈은 전 세계 금융시장서 ‘유동성 파티’
초저금리를 먹고 자란 정크본드는 과열 가능성을 상징하고 있다. 골드만삭스 측은 “정크본드 시장이 우려스러운 수준”이라면서 “어떤 충격이 발생하면 큰 손실이 나타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우량 자산은 이미 과열 단계다. 보험사 연기금 같은 장기투자기관에 더해 중앙은행까지 채권 매입에 가세하면서, 상당수 국채는 수익률이 마이너스다. 국채 가격은 치솟고 있다는 얘기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지난달 말 기준 마이너스금리의 국채와 회사채 발행 규모는 무려 11조6000억달러다. 우리 돈으로 1경원이 넘는 천문학적인 액수다.
양적완화 안 한 한국·중국 등도 초유의 완화정책
비전통적인 통화정책 국가만의 일은 아니다. 아직 정책금리 여력이 있는 국가들도 유동성 잔치를 벌이긴 매한가지다. 중국이 대표적이다. 중국 인민은행은 2014년 11월부터 1년간 금리를 6차례나 내렸고 같은 기간 지급준비율도 5차례 인하했다. 이로 인해 시중에 풀린 돈만 10조위안(약 1700조원)이다.
션지아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지난달 중순 중국 출장 때 깜짝 놀랐다. 베이징 상하이 등 대도시의 길거리에 주택 매물을 소개하는 전단지가 넘쳐났다는 것이다. “돈 되는 물건이 있다”며 행인들의 팔소매를 잡아끈다고 한다. 션지아 책임연구원은 “그 전에는 볼 수 없던 풍경”이라고 했다.
올해 들어 중국 부동산은 펄펄 끓었다. 100대 도시의 평균 주택가격은 올 들어 8월 말까지 11.7% 올랐다. 지난해 6월 이후 16.6% 급등했다. 그러자 정부는 지난달부터 규제의 고삐를 조였는데, 시장은 이에 아랑곳않고 어떤 식으로든 가격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중국 기업들 역시 자금을 부동산 외에 투자할 곳이 마땅치 않다는 반응이 많다.
한국 사회도 세계적인 조류와 비슷하다. 기준금리를 사상 최저인 연 1.25%까지 낮춰도 ‘L자형 불황’은 계속되고 부동산시장만 뜨고 있기 때문이다. 한은 고위관계자는 “비전통적인 통화정책이 아직 실물경제를 살리지 못 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