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칭찬에 인색했던 SRE 자문위원들의 한국신용평가에 대한 호평이 쏟아졌다.
한신평은 3월12일 KT를 워치리스트(Watchlist) 하향 검토 대상에 올렸다. 한신평은 100% 자회사 KT ENS에 대한 유동성 지원을 철회한 KT를 두고 AAA등급 회사로서의 경영관리 및 내부통제 능력에 의구심을 제기했다. KT가 1999년 1월 한신평으로부터 AAA등급을 부여받은 지 15년 만에 최상위 등급 유지에 빨간불이 켜진 것이다.
이어 한신평은 현대그룹의 등급도 급격하게 낮췄다. 한신평은 현대상선, 현대엘리베이터, 현대로지스틱스의 신용등급을 BBB+에서 투기등급인 BB+으로 강등했다. 그동안 신평사는 자산 매각 등 재무개선을 위해 구조조정을 하고 있는 기업들의 신용등급을 하향 조정하는데 주저하는 경향이 있었다. 구조조정 계획이 차질없이 진행될 것이라는 전제하에 등급을 유지한 것이다. 그 사이 STX그룹과 웅진그룹이 무너졌다. 신평사들은 ‘뒷북’ 논란에 휩싸였다.
시장에서는 일부 현대그룹 등급 조정 논리에 대해 공감하기 어렵다는 지적도 제기됐지만 전반적으로 파격적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무질서한 출구전략 논란
이데일리는 지난 3월24일부터 4월1일까지 증권사와 자산운용사, 은행 등 금융시장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19회 이데일리 신용평가 전문가 설문(SRE·Survey of Credit Ratings by Edaily) 조사를 진행했다.
전체 응답자 109명 중 크레디트 애널리스트 54명(50%), 채권매니저 38명(35%), 그밖에 채권브로커(IB포함)가 17명(15%)이 참여했다.
크레디트 애널리스트의 비율은 18회(44%) 대비 늘었다.
특히 회사채 업무 비중이 60% 이상인 참여자들이 지난 회 23%에서 53%로 크게 증가하면서 설문 결과에 대한 신뢰도를 높였다. 19회 SRE 결과 신용평가3사에 대한 등급신뢰도는 3.11점(5점 만점)을 기록했다. 지난 18회 대비 0.03점 하락했다.
반면 크레디트 애널리스트에게 후한 점수를 받았다. 크레디트 애널리스트의 등급신뢰도 점수는 3.07점으로 18회(2.98점) 보다 0.09점 올랐다.
현대그룹의 경우 3월 13일 NICE신용평가가 등급을 조정한 이후, 한기평이 잇따라 등급을 두 단계 하향했고 이튿날 한신평이 세 단계나 등급을 내렸다.
한 SRE 자문위원은 “다른 곳에서 등급감시 대상에 올리면 또 다른 곳에서는 등급을 내리고, 내부 평가심의위원회에서 등급을 평가하고 있으면 또 다른 신평사에서 서둘러 등급을 조정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했다”며 “일부에서는 신평사가 신용등급 평가에 감정을 실었다는 얘기까지 나온다”고 말했다.
‘돌아온 탕아’ 한신평
이번 19회 SRE에서 단연 눈길을 끄는 곳은 바로 한신평이다. 한신평의 평균 등급신뢰도는 3.08점으로 지난 18회 3.17점보다 0.09점 낮아졌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크레디트 애널리스트의 평가 점수는 3.22점으로 오히려 상승했다. 특히 한신평이 13회 SRE 이후 5차례에 걸쳐(15회 제외) 크레디트 애널리스트 점수가 3점을 넘지 못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눈에 띄는 개선이다.
현재 국내에서 회사채를 발행하는 기업 중 AAA등급 회사는 KT, 포스코, 현대차, SK텔레콤 4곳이 전부다. 이들은 사실 성역과 같은 존재다. KT나 포스코의 경우 글로벌 평가사의 잇따른 등급 하향에도 불구하고 국내 신평사들은 꿋꿋하게 AAA등급을 유지하고 있다. 국내 내수시장에서 차지하는 산업의 특수성과 비중을 감안했을 때 최상위 등급을 받을만하다는 주장이 우세했다. 그런데 한신평이 나서서 직접 KT에 칼을 들이댄 것이다.
SRE 자문위원은 “그동안 AAA등급에 대해서 글로벌 평가와 국내 평가는 다를 수밖에 없다는 논리로 일관해 왔는데 한신평이 등급감시 대상에 KT의 이름을 올렸다”면서 “투기등급을 변경하는 것과 AAA등급을 변경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평가했다.
SRE 자문위원은 “이번 등급 변경을 보고 시장에서는 한신평의 분노가 느껴졌다는 말도 나왔다”면서 “한신평이 KT ENS가 지급보증하고 있는 ABCP에 대해 평가하고 있는데 사실상 뒤통수를 맞은 격”이라고 말했다.
1990년대 말 회사채 시장은 대부분 보증채 시장으로 신용도가 낮으면 증권회사에서 보증을 받아 발행했다. 그런데 1998년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이러한 체제가 무너졌다. 결국 당시 신용평가시장을 주도하던 한신평이 선도적으로 기업신용평가를 재조정하기 시작했다.
한 SRE 자문위원은 “과거 경험 때문에 등급 조정에 소극적이던 한신평이 최근 신평사 이슈가 터질 때마다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무색무취’ 한기평
반면 이번 19회 SRE에서 등급신뢰도 1위를 차지한 한기평의 입맛은 쓰다. 지난 7회 이후 12차례 연속 1위 수성에 성공했지만 신뢰도 점수는 오히려 낮아졌다.
15회 이후 꾸준히 3.5점을 넘었는데 이번 회에 3.42점으로 점수가 떨어진 것이다. 특히 크레디트 애널리스트의 점수는 3.26점으로 지난 회(3.57점)보다 0.31점 낮아졌다. 업무 경력이 7년 이상인 시니어크레디트 애널리스트는 점수 하락폭이 더 컸다. 18회 3.58점에서 19회 SRE 3.03점으로 0.55점이나 줄어들었다. 시장에서는 그동안 적극적으로 등급 조정에 나서면서 시장을 이끌었던 한기평이 이번 회에는 인상에 남을만한 레이팅 액션이 없었다고 설명한다.
시장 참여자들은 최근 임원과 실장급에 대한 대대적인 인사 조치에 우려감을 표하기도 했다. 지난 1월20일 한기평은 신용평가 총괄임원과 담당 본부장을 교체했다.
한 SRE 자문위원은 “이번 인사 조치로 인해 한기평이 보여준 개혁적인 성향이 힘을 잃게 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또 다른 SRE자문위원은 “한기평이 레이팅 액션에서 특별히 인상깊게 한 것이 없다”면서 “한기평은 등급조정에 선제적으로 나선다고 주장하지만 오히려 프로세스 과정이 길어 몇 번 뒤늦게 등급조정한 경우가 있었다”고 말했다.
한진중공업의 경우 한신평과 NICE신평이 이미 지난해 말 BBB+ 등급으로 낮춘데 반해 한기평은 올 4월1일에야 가장 늦게 등급을 조정했다. 하지만 등급 조정 논리는 다른 신평사와 크게 차별성이 없다는 지적이다.
SRE 자문위원은 “한기평의 등급 조정과 관련한 내부 프로세스가 다른 신평사에 비해 긴 편”이라면서 “옴부즈만 평가에서도 한기평에 프로세스를 줄이라는 얘기가 나온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한기평 측에서 억울한 부분이 있다고는 하지만 등급조정이 늦어지는 일이 반복된다보면 자칫 시장의 오해를 받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 기사는 이데일리가 제작한 ‘19th SRE’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19th SRE는 2014년 5월9일자로 발간됐습니다. 책자가 필요하신 분은 문의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문의 : 02-3772-0161, mint@edail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