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로 가야 할까.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보지만 사방엔 모두 벽 뿐. 답답하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고, 내가 갈 곳은 어디인가. 구원의 길은 어디에 있는가. 구원, 그것은 과연 있기는 한 것일까. 만약 있다면 나를 구원해 줄 ‘님’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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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에게 묻다
지금이 인생의 가장 밑바닥이라고 느낄 때 즈음 설악산 백담사에 도착한다. 오후 3시40분의 산사 앞은 총천연색 아웃도어 의류로 무장한 등산객들로 붐빈다. 그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무심하게 수심교(修心橋)를 건넌다.
다리 밑 개울가에 사람들이 쌓아 놓은 무수한 돌탑들이 보인다. 세상에 이토록 많은 소원들이 있는 것인가. 사찰 입구 금강문(金剛門)을 바라보며 벌써 무료해진다. 나는 왜 여기에 온 것일까.
“요즘 사람들이 제일로 어려워 하는 일이 뭔지 아세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지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만큼 목소리가 곱고 깊은 지휴(智休)스님이 말한다. 그렇다. 나는 언젠가부터 무언가를 하고 있지 않으면 불안해 하는 강박을 갖게 됐다.
합장(合掌). 두 손을 맞대어 가슴에 올리고 인사를 하는 행위. 한 손은 나를, 또 한 손은 다른 사람을 가리키기에 합장은 ‘둘이 하나’라는 뜻이다. 그 설명을 듣자 딱딱했던 마음이 조금 말랑말랑해지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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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플스테이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참가자 15명이 자리에 앉아 공양을 한다.
“공양은 ‘먹기 명상’입니다. 음식의 고유한 맛, 질감을 느끼면서 어느 쪽으로 씹는지도 생각을 하며 먹습니다. 절집 음식은 남기는 법이 없습니다.”
법명이 보리행인 젊은 보살님의 엄명에 따라 공양기도문을 읊고 음식을 먹는다. 검은 콩밥과 무국, 연근과 표고버섯구이, 겉저리, 구절판, 미나리회가 놓여져 있다. 나는 한입에 열번씩 씹어 먹는다.
저녁 6시 경내 범종루(梵鐘樓)에서 북과 종소리가 울린다.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가는 무렵, 그 울림은 경내에 하루 중 가장 경건한 시간을 불러 온다.
‘님만 님이 아니다. 기룬(그리운) 것은 다 님이다. (중략)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나이다. (중략) 너에게도 님이 있느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은 헤매는 어린 양이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
시심즉불(是心卽佛)의 시간에 만해(卍海) 한용운의 ‘군말’을 읽는다. 만해는 1897년, 19살이 되던 해 백담사에 처음 입산했고, 7년 뒤 주지 연곡(蓮谷)스님에 의해 불문에 귀의했다.
“여러분에게는 특별한 님이 있습니까? 저는 출가하면서 다 버리고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불쑥불쑥 저도 모르게 떠오르는 님이 있더라고요. 저 역시 감당하기에 힘들었습니다…. 자, 지금은 특별한 님을 다 내려놓고 들여다 보는 시간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가장 충실한 시간입니다. 내려놓으세요.”
내려놓는다? 어떻게? 그저 나는 나를 내려놓으려 애를 써 본다. 하지만 번뇌는 계속해서 고개를 든다. 도대체 나에게 특별한 님은 누구인가. 나는 또 누구란 말인가.
“여러분은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보석입니다. 명품입니다. 세 번씩 외치세요. 그리고 자기 자신을 꼭 안아주세요.”
과연 그런가. 나는 나를 몰랐구나. 스님의 말씀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비로소 나는 수십 평생 세상사만 바라보던 눈을 나에게 돌려본다. 그리고 내가 나에게 묻는다. “그동안 나를, 나 자신을 사랑하기는 했니?” 대답이 없다. 님의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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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이 차오르고 땀이 뚝뚝 떨어진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고 싶지는 않다. 108배. 죽비를 든 지휴스님이 입을 연다.
“절을 하면 가장 변하는 것,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입니다. 마음에 상처입은 이들에게 좋습니다. 그리고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경혈을 자극하면서 몸도 건강해집니다. 소화 안된다고 약먹을 필요도 없고, 쑤신다고 병원 갈 필요도 없습니다.”
수승화강(水昇火降). 절을 하면 상체에 있던 화기(火氣)가 하체로 내려가는 효과가 있다. 전전두엽이 활성화해 집중력이 배가되는 효과도 있다. 같은 시간의 운동보다 절하기가 더 효험이 있다는 과학적 증거가 있다. 절은 어렵지 않다. 0.2평짜리 방석과 25분의 시간만 있으면 누구나 108배를 할 수 있다.
“절을 하는 것은 나를 내려놓는 일입니다. 이것을 하심(下心)이라고 합니다.”
나는 또 내려놓는다. 나를 들여다보며 속삭인다. “나를 사랑해보자.”
나와 14명의 참가자들이 연꽃잎 촛불을 들고 탑을 세 번 돌며 소원을 빈다. 이어 수심교로 나아가 밤하늘을 본다. 수천, 수만 개의 별들이 반짝인다. 그 한 가운데에 은하수가 그야말로 물처럼 흐르고 있다. 내 마음속에도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이 물처럼 흐른다.
새벽 3시30분. 산사의 하루는 속세보다 일찍 시작한다. 법당에서 졸린 눈을 비비며 새벽 예불을 드린다. 다시 108배. 어제보다 몸도 마음도 한결 가볍다. 꿈속에서 해우소(解憂所)라도 다녀온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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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중략)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중략)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만해의 ‘님의 침묵’을 연거푸 읽는다. 하룻밤을 지냈을 뿐인데 나를 깨우고, 비우고, 채우는 일이 무엇인지를 조금은 알게 된다. 마치 ‘크리스마스 캐롤’의 스크루지 영감처럼.
“영혼도 님이고, 육신도 님입니다.”
과연 그렇구나. 해인스님의 말씀에 혼잣말을 한다. 내가 그토록 찾던 ‘님’은 바로 ‘나’였다. 나를 구원할 님. 그 님은 내 마음에, 내 몸에 늘 있었다. 다만 세상사에 눈멀어 찾지 못했을 뿐이다.
오전 8시 ‘단풍과 함께하는 명상 트레킹’의 시간. 백담사에서 10리 가량 떨어진 영시암(永矢庵)까지 오고 가는 3시간이 넘는 산행이다. 험한 길 곳곳에 피어있는 이름 모를 갈꽃에 눈을 빼앗긴다. 묵언 산행의 약속을 깨고 입을 연다.
“이렇게 잊지 않고 피어줘서 고맙구나.”
왠지 눈물이 난다. 정말 고맙다. 갈꽃에도 고맙고, 세상에도 고맙고, 나에게도 고맙다. 백담사를 떠나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며 나는 생각한다.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 하였다. 나는 나를 보내지 아니 하였다.’
길라잡이=경춘고속도로 개통으로 서울에서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 백담사까지 과거 4시간 이상 걸리던 길이 2시간 30분으로 줄었다.
대중교통 이용시: 동서울종합터미널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용대리 정류소에 내린 뒤 백담마을 입구에서 10여분 간격으로 운행하는 셔틀버스를 타고 10분 정도 가면 백담사 앞에 도착한다.
자가용 이용시 : 서울에서 출발할 경우 올림픽대로에서 경춘고속도로로 진입한 뒤 동홍천IC에서 빠져나온다. 이어 44번 국도를 이용해 인제대교, 한계터널 등을 지난 뒤 백담삼거리에서 좌회전하면 백담마을 입구다.
◇ 템플스테이=한국불교문화사업단에서 운영하는 템플스테이는 지난 2002년 시작돼 지금까지 50여만명의 한국인과 9만여명의 외국인이 체험했다. 현재 총 118개 사찰에서 진행되고 있으며 수행형, 휴식형, 불교문화체험형, 생태체험형 등의 프로그램이 마련돼 있다. 참가비는 사찰별로 프로그램이나 숙박일수에 따라 1만~10만원선이다. 자세한 문의사항은 한국불교문화사업단에서 운영하는 홈페이지(www.templestay.com)나 고객정보센터(02-2031-2000)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