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2학년 정채은(17) 양은 매일 오후 8시 이어폰을 꽂고 유튜브를 켠다. 유튜브 서바이벌 오디션 '고등학생 간지대회(이하 고간지)'의 새 에피소드가 올라오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전국에서 옷 잘입기로 소문난 고등학생들이 출연해 다양한 미션을 수행하며 패션 경쟁을 벌인다. 브이로그로 참가자들의 일상을 나누고 스타일링 비법을 알려주는 비하인드 영상들도 있으니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채은 양은 "이미 반 친구들 사이에서는 고간지가 프로듀스 101만큼 인기"라며 "각자 고정 원픽(가장 선호하고 응원을 보내는 참가자)도 있다. 비공식적이긴 하나 특정 참가자들은 인기가 매우 많아 팬덤까지 생길 정도"라고 말했다.
'스무살은 너무 늦다.'
지난달 3일 방영을 시작한 유튜브 오디션 프로그램 '고등학생 간지대회'가 내세운 슬로건 문구다. 이 프로그램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TV와 웹을 불문, 예능 프로그램에 10대 청소년들이 핵심 인물, 콘텐츠로 등장하는 경우가 점점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미디어에서 최근 10대는 업계가 가장 주목하는 소비 주체이자 문화를 만들고 트렌드를 이끄는 생산 주체로 부상 중이다. 이는 경쟁과 포상이 주어지는 서바이벌 예능 프로그램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이를 두고 그간 콘텐츠 시장에서 소외된 10대들의 잠재력이 인정 받기 시작했다는 호평과 청소년들을 너무 일찍 금권 만능·자본주의 경쟁 사회로 내몰 수 있다는 우려의 시각이 분분했다.
고등래퍼에서 '고간지'...미디어 시장 주역된 Z세대
최근 방송계에서는 Z세대(1997년~2000년대생)를 핵심 소비자이자 생산자로 모시려는 움직임이 활발히 일어나고 있다. 이같은 움직임을 선도한 건 엠넷에서 시즌제로 방영한 오디션 프로그램 '고등래퍼'가 대표적이다. 지난 2017년 첫 시즌을 시작해 올해 시즌3 방송까지 마친 고등래퍼는 고등학생으로 구성된 래퍼 지망생들이 본인의 꿈과 삶을 참신하고 진정성 있는 가사에 담아 경쟁을 펼치는 장면들로 시청자의 공감을 샀다. 시즌별 미션곡과 우승곡이 음원차트를 점령하기도 했다. 현재까지 출연자들의 패션과 발언들도 포털과 SNS에 꾸준히 공유되며 화제가 되고 있다.
지난달 8일부터 방영 중인 tvN '고교급식왕'은 요리에 관심이 많은 '고등셰프'들이 학교 급식 레시피를 직접 제안해 경연을 벌이는 내용으로 주목 받았다. 거기에 활발한 외식사업, 방송활동으로 대중 인지도가 높은 백종원 더본코리아 대표가 고등 셰프들의 아이디어에 노하우를 더해주는 역할로 출연해 인기를 얻고 있다.
오디션으로 전국의 패션에 관심 많은 고등학생 13인을 '고간지' 참가자로 선발해 두 달 간 합숙을 통해 다양한 패션 과제, 스타일링 미션 등 경쟁을 소화시킨다. 특히 우승자 1인에게는 1억원의 연봉과 부모님께 드릴 효도 선물(벤츠), 개인 패션 브랜드 론칭 기회를 제공하는 파격적인 포상이 주어진다.
서바이벌 프로그램 최초 1일 1회 데일리 편성에 고간지 지원자들의 캐릭터와 일상을 살펴볼 수 있는 브이로그, 비하인드 영상 등 다양한 볼거리를 담아 화제가 됐다. 또 지원자들의 일상 패션과 프로필, 미션 화보 사진 등을 인스타그램에 실시간 게시해 구독자들과 끊임없는 소통 행보를 펼치고 있다. 모델 문가비, 가수 김희철, 유튜버 양팡, 래퍼 레디, 한혜연 스타일리스트 등 막강한 심사위원 군단도 눈길을 끌었다. 지난달 3일 첫방송이 조회수 360만명을 넘었고 방영 한 달 도 채 안돼 채널 구독자 수 10만명을 돌파해 화제가 됐다.
블랭크코퍼레이션 측은 "지금의 고등학생은 유사 이래 가장 발달된 디지털 환경 및 물질적 풍요로움 속에서 다양한 문화와 트렌드를 향유하고 있는 대표적인 Z세대"라며 "Z세대와의 접점 마련과 호흡이 모든 산업에서 주목해야 할 가치가 될 것"이라고 기획 취지를 밝혔다.
하재근 대중문화평론가는 "TV 방송사들을 중심으로 일반인 청소년들을 타깃으로 내세운 예능 프로그램이 많아지고 있는 것은 업계 관계자들이 앞으로 시장의 핵심 소비 권력이 될 Z세대 시청층들이 점점 이탈하고 있는 현상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는 점을 방증"한다며 "유튜브 등 SNS 채널 영역은 이미 Z세대가 점령하고 있다. 이같은 변화에서 방송계, 산업계가 살아남으려면 이들 세대의 취향과 특성을 고려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가능성 발굴' 호평 VS '지나친 경쟁·금권 만능주의' 우려
회사원 윤아영(가명·26)씨는 "처음 유튜브로 이 프로그램을 접했을 당시에만 해도 겉멋만 잔뜩 든 고등학생들을 데려다 인플루언서 마케팅을 하려는 건가 싶어 거부감을 느꼈었다"면서도 "그러나 방송을 볼수록 현직 디자이너 못지 않은 출연자들의 전문성에 놀라고 이들의 패션에 대한 열정도 진정성 있게 느껴져 애청자가 됐다. 그간 어른들이 어리다고 10대들의 가능성을 무시해왔던 건 아니었나 되돌아보는 계기도 됐다"고 말했다.
고등학생 시청자 고혜연(16)양도 "이미 슈퍼스타K, 케이팝스타 등 음악 오디션 프로그램에선 어린 지원자들이 숱하게 나왔는데 패션 등 다른 분야라고 그러지 말아야 하는 법이 있나 싶다"며 "오히려 어린 청소년들의 재능과 끼를 일찍 발굴할 수 있는 다양한 분야의 프로그램들이 많아지는 게 사회의 발전에 도움도 되지 않을까"라고 강조했다.
반면 업계가 성장기 청소년들의 윤리 의식 함양 등 사회적 책임에 관한 고민 없이 Z세대 소비자들의 환심을 사고자 과도한 포상 등 자극과 재미에만 몰두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회사원 성유라(27)씨는 "극 중 고간지 출연자들이 입고 있는 옷들은 티셔츠 하나만 수십만원을 넘는 고가제품인데다 스타일링 미션에 활용되는 의류들도 발렌시아가, 버버리 등 대부분 명품"이라며 "아직 의사결정이 미성숙한 고등학생에게 연봉 1억에 벤츠, 단독 패션브랜드 론칭 기회를 준다는 것도 시기상조 같다. 이미 출연자들 중에선 동년배 청소년들의 선망을 받는 인플루언서들이 많은데 또래 학생들에게 이같은 장면들이 지속적으로 노출하는 것이 이들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비판했다.
하재근 평론가 역시 "10대 디자이너, 스타일리스트 꿈나무를 발굴해 재능을 키워주겠다는 프로그램의 기획 취지는 좋다"면서도 "PPL을 연상시킬 수준으로 특정 브랜드의 명품 제품을 출연자들의 패션 등을 통해 방송에 노출하고, 고가의 명품을 경품으로 내세운 구독자 이벤트를 진행하는 것은 이 프로그램의 주 시청층인 또래 학생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심어줄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앞으로도 Z세대 시청자와 소비자를 사로잡으려는 업계의 움직임이 지속될 거고 이같은 움직임이 업계에 좋은 영향력을 불어넣어주겠지만 업계가 영리 목적 이외 청소년들의 인식 함양 등 사회적 책임도 고려해가며 마케팅 전략을 펼쳐야 한다고 본다"고 조언했다.
/스냅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