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강원도 고성 ‘DMZ 평화의길’ 프로그램에 참가했을 때의 일이다. 버스터미널에서 통일전망대까지 이동해야 하는데 자가용도 없고 택시비는 말도 안 되게 비싸서 히치하이킹(hitchhiking)을 하기로 했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꽤 빠르게 히치하이킹에 성공해서 ‘아직도 이런 인심이 남아 있구나’ 느끼는 한 편, 몇 년 전 타지키스탄(Tajikistan)의 ‘파미르 하이웨이(Pamir Highway)'를 여행할 때 히치하이킹 했던 기억이 났다.
차가 거의 다니지 않고 대중교통도 없는 곳이라서 차도 자전거도 없이 여행이 가능하긴 할까 생각했던 파미르 고원이었는데 정말 신기하게도 차가, 그리고 히치하이킹에 응해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파미르 하이웨이를 잘 여행할 수 있었다. 그 후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타지키스탄의 다른 멋진 곳보다도 파미르 하이웨이가 가장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건, 어쩌면 타인의 호의에 자신을 완전히 내맡겼던 히치하이킹의 경험 때문일 것이다.
카라쿨을 벗어나는 데 필요한 시간, 8시간 30분
파미르 하이웨이에서 히치하이킹이 제일 어려웠던 곳을 꼽으라면 두말할 것 없이 ‘카라쿨(Karakul)'을 들 것이다. 키르기스스탄-타지키스탄 국경에서 50km 이상을 달려야 나오는 첫 번째 타지키스탄 마을이자 ’검은 호수‘란 뜻의 카라쿨 호수 바로 옆 마을인 카라쿨에서 하루 묵을 때였다. 국경에서 2시간을 기다린 끝에 겨우 히치하이킹에 성공해서 도착했던 카라쿨의 첫인상은 차분하고 건조했다. 5000m가 넘는 산봉우리들에 둘러싸인 채 오래된 포장도로와 잔잔한 호수 사이에 자리 잡은 이 마을은 작고 조용해서 바람 부는 소리만 들리는 곳이었다.
주변 경치에 매료돼서 하루를 보내고, 아침 9시에 다음 마을인 ‘무르갑(Murghab)’으로 이동하려고 도로에 나왔는데, 그제야 이 동네는 차가 거의 지나다니질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무르갑 방향으로 가는 차는 1시간에 1대 정도가 지나갔는데 대부분 짐과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카라쿨에 오기 전 국경에서도 2시간을 기다렸으니 어떻게든 되겠지란 생각으로 무작정 기다렸는데, 기다림이 무색하게 차는 안 오고 시간은 꼬박꼬박 흘러갔다. 한두 시간이 서너 시간이 되고, 다시 대여섯 시간이 지나면서 희망은 조금씩 사라지고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란 생각이 커지기 시작했다. 봐도 봐도 질리지 않을 것 같던 풍경과 정감 가던 조용한 마을은 어느새 유배지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해발 4000m 마을이라 그런지 오후 4시를 넘어가면서 기온도 많이 떨어지고 바람도 더 많이 불기 시작했다.
랑가르 행 히치하이킹은 행운을 싣고
무르갑을 지나 파미르를 달리다 보면 나오는 작은 마을 ‘알리출(Alichur)’은 볼거리나 즐길거리가 딱히 없는 다소 황량한 곳이지만 이곳의 숙소 한 곳이 작은 건식사우나를 운영하고 있어서 잠깐 쉬어가며 여행의 피로를 씻어내기엔 제격이었다. 이곳에서 다음 행선지를 정하려고 보니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하나는 포장도로를 따라서 파미르의 중간 거점 ‘호로그(Khorog)'로 바로 가는 것, 다른 하나는 파미르에서 뻗어 나온 비포장도로를 따라 아프가니스탄과 좁은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한 ’와칸 밸리(Wakhan Valley)'를 경유해서 호로그로 가는 것이었다. 전부터 와칸 밸리가 아름답다는 얘기를 많이 들어서 별 생각 없이 후자를 택했다. 비록 알리출도 차가 정말 뜸한 곳인데다가 비포장도로인 와칸 밸리 쪽으로 가는 차는 더욱 없다는 게 문제긴 했지만, 이미 카라쿨에서 8시간 넘게 기다린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차를 못 잡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침 일찍 알리출 숙소 앞에서 히치하이킹을 하는데 서양 사람들이 탄 투어용 승합차 두 대가 지나갔다. 그러고 얼마 안 가 타지키스탄 사람들이 탄 차를 잡았는데 와칸 밸리에 있는 ‘랑가르(Langar)'로 간다고 하니 일단 타라고 한다. 차는 빠른 속도로 달려서 앞서 가던 차 몇 대를 추월해버리고는 와칸 밸리 입구에 멈춰 섰다. 여기까지라도 태워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하는데 숙소 앞에서 봤던 승합차 두 대가 와칸 밸리 입구로 들어오고 있었다. 아까 봤을 때 차에 자리가 좀 있어서 다시 한 번 히치하이킹을 시도했는데 이번에도 그냥 지나쳐 갔다. 많이 바쁜가보다 생각하는데 방금 지나친 그 차가 저쪽에서 멈추더니 서양 사람 한 명이 빨리 오라는 손짓을 했다. 두 번이나 놓쳤던 차를 다시 놓칠 수 없어 부리나케 달려가 차에 탔다.
차를 타고 가면서 얘기를 들어보니 독일에 있는 여행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인데 타지키스탄의 여행 상품을 체험하는 중이라고 했다. 그리고 오늘 목적지는 놀랍게도 랑가르(!)였다. 차도 잘 안 다니는 험준한 비포장 산길을 내릴 걱정 없이 한 번에 가게 돼서 마음이 놓였는데 그 외에도 좋은 점이 한 가지 더 있었다. 바로 그 차가 투어 차량이라는 점, 그래서 랑가르로 가는 길의 모든 핫스팟마다 내려서 사진 찍는 시간을 가진다는 점이었다. 실크로드 상인들이 지나던 길, 멀리 아프가니스탄 쪽에 솟아 있는 '힌두쿠시(Hindukush)' 산맥의 하얀 봉우리들, 보기만 해도 가슴이 시원해지는 폭포 등 다른 차를 탔다면 ‘와, 예쁘다’하고 지나쳤을 장소들 모두 카메라에 고이 담을 수 있었다.
우리 히치하이킹으로 만났어요, 노아와 랜
히치하이킹으로 탄 차를 다른 히치하이커가 잡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 랑가르에서 다음 목적지 ‘이쉬카심(Eshkashim)’으로 가는 날이었다. 아침부터 길에 나왔지만 차가 잘 잡히지 않아서 히치하이킹하다 걷다를 반복하던 중에 겨우 지프차 한 대를 잡았다. 차를 타고 이쉬카심으로 가는 길에 사람이 몇 명 더 탔는데 그 중 두 명이 히치하이킹으로 탄 이스라엘인 여행자였다. 파미르 여행자의 대부분이 자전거 여행자였고 나머지 소수는 오토바이 여행자나 투어 상품을 구매한 여행자였다. 엄지손가락으로 차를 세우는 다른 히치하이커는 만난 적이 없어서 큰 동질감을 느끼며 인사를 주고받았다. 여자는 노아(Noa), 남자는 랜(Ran)이었고 그들도 이쉬카심으로 간다고 했다. 얼떨결에 동행이 돼서 이쉬카심에 내려서도 같은 숙소에 묵었는데 그걸 시작으로 총 10일 동안 같이 다니게 됐다.
알고 보니 노아와 랜은 프로여행러였다. 4일, 5일씩 캠핑하며 트레킹하는 건 기본이고 학생 신분을 어필하며 숙박비를 깎을 수 있는 곳은 모두 깎았다. 또 여행지 정보는 어디서 그렇게 모았는지 들어보지도 못한 곳을 데려가거나 추천해주는 게 일상이었다. 타지키스탄 여행을 하며 본 곳 중 세 손가락 안에 꼽힐 만큼 아름다운 자연 환경을 품은 ‘지제브(Jizew)'도 그 중 하나였다. 호로그에서 차를 타고 한참을 달린 후에 다시 몇 시간을 걸어 올라가야 나오는 산골마을 지제브는, 이 친구들이 아니었으면 방문은커녕 존재 자체도 몰랐을 곳이다.
이쉬카심 가는 히치하이킹 차량에서 만나 파미르 여행의 종착점인 타지키스탄의 수도 ’두샨베(Dushanbe)'까지 함께 하면서 노아와 랜은 파미르 여행을 전보다 훨씬 풍성하게 만들어줬다. 두샨베에서 헤어질 때는 나중에 서로의 나라로 꼭 놀러가겠다는 약속도 했다. 여행하면서 히치하이킹으로 잡았던 게 과연 차뿐이었을까. 히치하이킹으로 만난 인연들을 생각하며 고개를 저어본다.
/스냅타임